여름의 말로

능소화 (凌霄花)

by 온우

















햇빛이 제일 느리게 드는 담장이 있다.

오전 내내 그늘 속에 묻혀 있다가 해가 기울 무렵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오래된 벽돌들.


그 담벼락 너머로 불쑥 고개를 내민 얼굴.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뜨면 얇게 띈 시야 사이로 네가 흔들린다.


피어 있는 줄도 모르고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쳤는데, 흙냄새 같은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는 그 담장을 너는 말없이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햇빛이 내려앉던 시간에 나는, 너를 오래 바라봤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였지만

손을 뻗진 않았다.

닿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일에 익숙했다.


붉은 잎이 움직일 때마다 너는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계절을 통째로 품은 듯했다. 무릎을 꿇고 바라보는 이가 있었는지도 모른 채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닿지 못한 손끝이,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그 벽을 타고 자란 흔적처럼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너를 그저 여름이라 했지만

너의 그늘이 얼마나 길었는지 나는 안다.


햇빛이 닿지 않는 담장의 아래쪽,

물도 들지 않는 벽 틈에서 아무도 너를 찾지 않던 계절을 오래 지나, 무너진 틈을 붙잡고 올라야만 겨우 여름이 된다는 걸.


너를 보는 시선이 자꾸만 나를 비춘다.

너에게서 나를 본다.



어쩌면 그래서 더 오래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너를 닮은 마음이 내 안에도 있었다.

한참을 벽을 타고 자라다가 순간 방향을 잃고도 계속 피고 있었다.


한 여름 바람이 느리게 내 어깨를 지나간다.

나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뻗었던 마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피어났기에

말없이 지는 순간은 끝끝내 눈을 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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