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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27. 2024

 2. 할머니의 노트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

택시가 병원 정문에 멈춰 섰다. 차 문을 여니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한국의 7월 날씨를 잊고 있었던 지아와 엄마는 무방비 상태에서 온방과 냉방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이탈리아의 여름도 뜨거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한국의 여름보다는 나았다.

트렁크에서 짐 두 개를 꺼내어 기다리니 저만치서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엄마는 그 사람을 보며 두 손을 흔들어 댔다.

"정우야,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내가 진짜 미안하다. 너한테 우리 엄마를 맡겨 놓고."

"에이, 누나.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에. 이모가 남인가 뭐. 오느라 고생 많았어. 어, 이게 누구야. 지아 아니야? 삼촌 기억 나니?"

지아는 정우 삼촌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할머니 집에서 지냈을 때 한 번씩 찾아와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던 삼촌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한국말 이제 잘하나? 안 까묵었나?"

지아는 정우 삼촌의 말에 그저 빙그레 웃었다.

"누나, 지금은 면회가 좀 까다로워졌어. 이모가 중환자실에 있어서 더 그래. 시간도 정해져 있어. 이모 집에 가 있는 건 어때? 아니면 우리 집에 있던지."

"아니야, 엄마 마지막이라도 내가 옆에서 지켜드려야지.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 모르는데 내가 있어야지. 지아가 걱정이네."

엄마가 지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할머니 집에 가 있을게."

지아는 낯선 삼촌 가족들과 지내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할머니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10년 전에 살아본 적이 있으니, 많이 낯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그럼 엄마는 할머니랑 병원에 있을 테니까, 넌 할머니 집에 잠깐 있어. 별이도 챙겨줘야 하고. 할머니 깨어나시거나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 할 테니까. 알겠지?"

"응."

엄마와 정우 삼촌은 병원 원무과로 가서 지정보호자를 변경했다. 엄마의 팔목에 할머니의 이름 "정금자"와 엄마의 이름 "이동주"가 나란히 써진 팔찌가 채워졌다. 이제서야 자식 노릇을 하게 된 것이 미안했던 엄마는 내내 눈물을 글썽였다. 지아는 그런 엄마를 병원에 남겨두고 정우 삼촌 차로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 집에 가려면 30분을 더 가야 했다. 그곳은 다니는 차도 별로 없고, 편의점도 없는 깡시골이었다.

"가는 길에 마트 들려서 먹을 거 좀 사갈까?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아... 음... 잘 모르겠어요."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삼촌한테 말하고. 삼촌이 사다 줄 테니까. 근데 할머니 집에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하긴, 이제 어른이니까. 옛날엔 그냥 애기 같더니 이젠 다 컸네."

지아는 삼촌의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입을 닫았다. 머릿속에는 말해야 할 한국말이 떠올랐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아직 어색했다. 자꾸 이탈리아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고 있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니 별이가 왕왕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별이도 이젠 나이가 들었는지 동작이 많이 느릿해져 있었다. 지아 뒤를 느릿느릿 따라오는 별이의 털을 지아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털이 듬성듬성 빠진 것을 보니 지아는 마음이 아렸다.

“별이 잘 있었어?”

"아이고, 별이가 지아를 아직도 기억하나 보네. 이 녀석 밥부터 챙겨줘야겠다. 지아야 가방 들고 방으로 먼저 들어가. 할머니 집 비밀번호 아니? 옛날 그 번호 그대로일 거야."

"네. 알아요."


지아는 할머니 집 현관의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1230" 엄마의 생일이었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 지아는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집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쇼파와 텔레비전의 위치도, 할머니가 애정하던 앉은뱅이책상도, 주방의 식탁 위치와 의자도, 심지어 책장에 꽂혀있는 책도 그대로였다. 할머니 집에 들어선 지아는 마치 10년 전으로 타임슬립 한 기분이 들었다. 지아는 거실 한쪽에 가방을 내려 놓고 창을 활짝 열었다. 여전히 날이 더웠지만, 며칠 동안 사람의 흔적이 없어 텁텁해진 집안 공기를 환기시키고 싶었다. 마침 선풍기가 있어 가장 바람이 센 걸로 틀었다. 선풍기는 덜덜거리며 돌아가더니 따뜻한 바람을 만들어 냈다.

"지아야, 삼촌 이제 가봐야 해. 장 봐온 거 냉장고에 넣어두고. 아마 할머니가 드시던 거 냉장고에 남아 있을 거야.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삼촌이 데릴러 올게. 아 그리고 별이 밥 좀 잘 챙겨 줘. 저기 창고에 사료도 있고, 먹다 남은 밥 줘도 되고. 삼촌 그만 갈게."

"네. 안녕히 가세요."

삼촌까지 가고 나자 오롯이 혼자가 된 지아는 긴장이 탁 풀렸다. 지아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할머니 집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공유기 뒤를 봐도 비밀번호는 없었다. 지아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책장을 찾아보았다. 주인이 없는 책장엔 먼지가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책장을 뒤지던 지아는 낯익은 노트를 하나를 발견했다. 3-1이라고 써진 공책이었다. 거기엔 "박지아" 라고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어머, 이 노트가 아직도 있었네? 할머니는 버리지도 않았나 봐."

지아는 그 공책을 펼쳐보았다. 한글 띄어쓰기와 받침 쓰기를 어려워하던 지아를 위해 할머니가 사 오신 공책이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서툴지만 또박또박 쓴 글자들이 네모 안에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문득 할머니에게 "헤일 듯 한" 것이 뭐냐고 물어봤던 15살의 자신이 떠올랐다.

지아는 공책 옆에 또 다른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그 노트엔 네모 대신 가로줄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필체가 분명한 글이 써 있었다.



그리움을 묻고

그립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했네
저 하늘의 별이 된 내 어머니가 그리운 것인지
저 바다의 파도가 된 당신이 그리운 것인지
저 멀리 타향에서 외로움조차 모르고 살아갈 내 딸이 그리운 것인지
그립다고 말하면 정말로 그리될까 하여 차마 말하지 못했네  


할머니가 남겨 놓은 노트와 공책을 들춰보며 지아는 10년 전의 날들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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