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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20. 2024

1. 마음이 회귀하는 곳, 할머니

(연재소설)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 곧 착륙합니다. 안전벨트를 꼭 착용해 주세요. 레이디스 앤 젠틀맨~ "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 끝나자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인천엔 비가 오는지 작은 창에 물이 흘렀다. 지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피곤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지는 걸 지아는 보고 말았다. 지아는 그런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항상 즐겁게 오던 하늘길이 이번엔 눈물길이 되었다.


비행기가 멈추고, 안전벨트 불이 꺼지자 사람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엄마는 역시 빠른 몸놀림으로 짐칸에 놓인 두 사람 몫의 캐리어를 재빠르게 꺼냈다.  그리고는 이미 통로에 서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좀 천천히 하라고 타박했을 텐데, 이번엔 지아도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마음은 이미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달려 나가 택시를 타고 할머니가 있는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아는 말없이 엄마를 따라 통로에 가서 섰다. 이내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비행기 밖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지아는 이제껏 수십 번도 더 와 본 인천 공항인데  이번엔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물론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잠깐 한국에 와서 맛있는 걸 실컷 먹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건 좋았다. 하지만 그뿐. 지아는 이내 밀라노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국은 편리하고 좋은 나라였지만, 마음을 한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나라였다. 그게 언어의 장벽 때문인지, 마음의 장벽 때문인지 지아는 알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지아의 고향은 밀라노다. 한국 사람이지만 밀라노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어보다 이탈리아어가 더 편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상하게 고향에 오는 기분이 들었다. 지아는 그게 할머니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말할 때마다 추임새처럼 따라붙던 "아따~"와 몸동작은 굼뜨지만 손놀림은 재빠르던 할머니의 모습이 물밀듯 밀려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엄마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곤 전화를 했다.


"응, 나 이제 비행기에서 내렸어. 그래, 응. 응. 공항버스 타고 갈게. 그래. 미안하다, 급히 오느라고 아무것도 못 가져왔어. 아니야, 그래도. 그래. 좀 이따 보자."

"엄마, 할머니는?"

"응, 의식이 없으시대."

"의식? 이 뭐야?"

"아... 음... 정신? 이 없는 거? 아니다. 의식이 없다는 건..... 깨워도 눈을 뜨지 않는 거....."

이내 엄마의 두 눈이 붉게 변하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 미안, 괜히 물어봤네."


지아가 모르는 한국어를 엄마에게 물어보는 건 거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살며 이탈리아 말을 하고, 이탈리아 학교를 다녀야 하는 지아에게 한국어는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집에선 주로 한국말을 썼지만, 일상적인 대화는 아주 간단한 말로도 충분히 통했다. "응, 아니, 몰라." 이 세 단어면 충분했다. 엄마도 아빠도 너무 바쁜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선택해야 했다. 지아는 생존을 위해 이탈리아어를 자신의 모국어로 선택했다. 그러니 한국어는 자연스레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한국어는 엄마에게 물어보면 됐다. 엄마는 이탈리아어는 서툴지만, 한국어는 잘한다. 밀라노에서 30년을 살았으면서 아직도 이탈리아어를 어색하게 말하는 엄마를 지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엔 지아가 통역을 해줘야 하기도 했다. 밀라노에선 엄마가 나에게, 한국에선 내가 엄마에게 언어를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습관과도 같았다. 이미 알던 단어라고 해도 한 번 더 물어본다. 실수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이번엔 이 습관을 잠시 내려놔야겠다고 지아는 생각했다.


입국심사를 거친 후 지아와 엄마는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들 어디에 다녀온 걸까? 그러고 보니, 밀라노에서 출발했던 비행기가 남는 좌석이 없이 가득 찼던 것이 떠올랐다. 그중엔 이탈리아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으로 여행 가는 이탈리아 사람들이라니.....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아는 건 겨우 북한과 남한으로 나눠 아직도 전쟁 중인 나라가 전부였다. 그런 나라에 여행을 오다니.... 심지어 한국으로 여행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다니.....

지아는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되지? 아휴, 여기는 올 때마다 복잡해 죽겠어. 잠깐만..... 어디 보자... 순천 여수로 가는 버스가..... 아 저기 있다. 2시간 후에 출발하네? 잠깐 쉬었다 가야겠다. 아이고 멀다 멀어. 잠깐, 내 한국 카드가 어딨 더라... 지갑에 잘 넣어 두었는데. 왜 안 보이지? 아 찾았다. 자 이제 표를 끊어보자. 우리 두 사람이니까, 이거 누르고, 순천 누르고, 결제 방법은 카드. 아니 카드를 어디에 넣어야 해? 잠깐 만.... 음..... 야 이거 오랜만에 하려니 도통 모르겠네."


엄마는 한 손에 카드를 들고 표를 끊는 키오스크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했다.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보다 못해 도와주고 나서야 겨우 버스표 2장을 끊을 수 있었다.


"한국에 오랜만에 오셨나 봐요. 요즘은 핸드폰 어플로 다들 해요."

"아 네. 올 때마다 헷갈리네요."


지아는 갑자기 피곤함을 느꼈다. 13시간의 비행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 소란한 한국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덕분에 엄마의 슬픔이 잠시 뒤로 밀려난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공항에서 2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엄마는 잠에 빠져들었다. 할머니가 있는 곳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3시간을 더 가야 했다. 지아는 두 눈을 꼭 감고 팔짱을 끼고 자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도 젊었을 땐 이런 모습이었을까?'

지아는 할머니의 젊었을 적 모습을 상상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지아가 회상할 수 있는 건 10년 전의 할머니였다. 지아가 15살이었던 그때. 할머니 집에서 3개월을 살아야 했던 그때.....


'진주는 잘 있을까.....'

잊고 지냈던 진주가 떠올랐다.  할머니 집 근처에 살던 진주. 외모는 외국인이지만 영어는 잘못하던 진주.

지아는 진주를 떠올리다 엄마를 따라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밀리의 서재를 이용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연재소설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를 브런치북으로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금자 씨, 많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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