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
금자 씨는 읍내에 가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10년이 다 돼 가는 작은 소형차였지만, 금자 씨는 이 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시골에서 운전을 할 수 있는 노인은 많지 않았다. 남편이 있는 여자들은 괜찮았지만, 혼자 사는 여자들은 대부분 운전을 못해 읍내에 가려면 꼭 버스를 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금자 씨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운전할 수 있는 할머니였다.
금자 씨가 운전을 배운 건 10여 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남편 때문이었다. 폐암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녀야 했는데 버스로 다니기엔 너무 힘들었고, 택시로 다니기엔 너무 비쌌던 것이다. 그때 금자 씨는 손수 운전을 배웠고, 초보 운전자였지만 남편을 차에 태워 병원에 다녔다. 그 덕분에 지금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라고 갈 수 있는 기동력이 생겼다.
남편을 먼저 보낸 후 헛헛함이 밀려올 때마다 금자 씨는 운전을 했다. 근처 바닷가로 가서 하염없이 파도를 보는가 하면, 근처 도시로 나가 하염없이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 사는 딸이 엄마를 걱정하며 연락할 때마다 차를 끌고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딸 동주도 낯선 나라에서 살아내느라 애쓰고 있다는 걸 아는 금자 씨였다. 금자 씨는 되려 동주가 지아를 혼자 낳고 키우는 게 안쓰러워 미안하고 눈물이 났다. 그래서 딸이 자신에게 손녀를 부탁했을 때 이제야 엄마와 할머니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다.
"엄마는 그 누구의 마음도 어루만지는 힘이 있잖아. 내가 한참 방황할 때도 엄마는 그랬잖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주고, 그냥 옆에만 있어 줬는데도 그게 힘이 되었거든. 우리 지아에게 그런 할머니가 필요한 것 같아서...."
지아를 부탁하며 동주는 이렇게 말했다.
금자 씨는 스무 살에 결혼을 했다. 맞선 자리에 나온 남편을 보자마자 자신이 좋아하는 윤동주를 빼닮은 것 같아 마음이 설레었다. 금자 씨가 시인 윤동주를 좋아하게 된 건 중학교 때 처음 배운 시 "서시"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감성적이고 책을 좋아하던 소녀의 마음에 서시는 불을 지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194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수록>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금자 씨는 서시를 읊조렸다. 그러다 보면 꽃처럼 아름다운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하늘의 별이 된 시인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힘을 내라며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 구절은 금자 씨에게 신앙이나 다름없었다. 사랑하며 살라는,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주어진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가라는 믿음이었다.
금자 씨는 지아를 옆자리에 태우고 집을 나섰다.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가니 큰 도로가 나왔다. 그곳에는 읍내를 오가는 버스가 서는 작은 버스 정류장 하나가 있다. 거기에 여름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 한 명이 앉아있었다. 그 아이의 외모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피부도 한국사람에 비해 그을린 듯 어두웠고, 눈도 굉장히 컸다. 한국 사람보다도 동남아 사람에 조금 더 가까운 듯한 외모는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이런 시골 할머니 집 버스 정류장에서 이런 외모를 가진 남자아이를, 게다가 교복을 입은 아이를 만난 것이 꽤 신기했다.
"아니, 진우야. 학교를 왜 이제 가? 지각 아니여?"
"아, 할머니. 안녕하세요."
"왜, 뭔 일 있는 거여?"
"아니에요. 늦잠 잤어요."
"그러믄 다행이고. 진주는? 아침은 먹었고?"
"진주는 먼저 갔어요. 아침은 먹었어요.”
진우는 할머니 곁에 서 있는 지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 우리 손녀. 저기 멀리 이딸리아에서 살다 잠깐 왔단다."
"Hi. Nice to see you."
지아는 이국적으로 생긴 진우를 향해 인사를 했다.
"나 영어 못하는데.”
진우의 말에 지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허허허. 진우는 한국 사람이여. 그러고 보니 진우랑 지아랑 친구네. 둘이 친구 하면 되겠네. 할머니 읍내 가는데 학교까지 태워줄까?"
"아, 아니에요. 곧 버스 와요."
"그래, 그럼 잘 가고. 또 늦잠 자지 말고. 김치 필요하믄 말하고."
"네."
금자 씨는 진우를 버스정류장에 그대로 둔 채 읍내를 향해 핸들을 돌렸다. 진우는 자신을 스쳐 달려가는 차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10분 후 1시간에 한 번 운행하는 버스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버스정류장에 멈췄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어, 진우 오늘도 늦잠 잤냐?”
“네.”
“그라믄 아저씨가 좀 달려봐야쓰것네. 어여 자리에 가서 앉어.”
겨우 4명의 승객을 태운 시골 버스는 다시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금자 씨 차가 멈춘 곳은 꽤 큰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거기엔 "구진 군청"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아야, 내리자. 할머니 여기 문화센터에서 수업이 있거든. 수업 끝나면 같이 짜장면 먹고 가자."
"네."
금자 씨가 지아를 데려간 곳은 구진 군청 건물 1층에 있는 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는 구진 군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요일별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중에 금자 씨가 참여하고 있는 수업은 바로 "시 교실”이었다.
"원래는 시 교실이 없었는디, 할머니가 만들어달라고 여러 번 말해서 이번에 생겼어. 시 선생님도 어디 신문에서 등단한 사람이고. 유명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시인이잖아. 사람이 몇 명 없으니까 너도 조용히 한번 들어봐. 할미는 시를 배우고, 너는 한글 배우고. 좋제?"
지아는 학교 문학 시간에 배우던 poesia가 떠올랐다. 학교에서는 시를 매번 외워 발표해야 했다. 지아에게 시는 그저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위한 공부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시를 공부해야 한다니.... 지아는 금자 씨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깨 깟죠(che cazzo)'
지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지아 뭐라고 했니?"
"아니에요."
지아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른 입을 다물었다.
교실로 들어가니 금자 씨와 비슷한 연배의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 그리고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금자 씨 어서 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니 이 예쁜 아가씨는 누구예요?"
선생님으로 보이는 여자가 지아와 금자 씨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손녀예요. 저기 이탈리아에서 왔어요. 나 수업 들을 때 우리 손녀는 한글 공부 좀 하라고 데려왔지."
"오 이탈리아에서 왔다니, 정말 멋지다. 반가워. 이름이...."
"박 지아입니다."
"오메 반갑네. 근데 학생이 여기 말고 학교를 가야 되는 거 아니여?"
"아이고, 다 사정이 있으니까 그렇지. 뭔 말이 많어. 어여 수업하셔."
곱슬머리 할머니를 향해 금자 씨가 쏘아붙이며 말했다.
"자, 오늘은 꽃과 나비에 대한 시를 써보겠습니다. 꽃과 나비,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죠? 자, 시간 30분 드릴게요. 시작!"
지아는 “시작”소리와 함께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이렇게 주제를 던져주고 무작정 써 내려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지아야, 너도 써봐."
"뭘?"
"시 말이야. 시. 그냥 쓰면 돼."
"그냥 아무거나... 요?"
"응, 꽃과 나비에 대해 그냥 써. 못 써도 상관없으니까. 넌 한글 쓰기 공부한다... 생각하고 써봐."
"네."
지아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주섬주섬 꺼냈다. 멍하니 빈 공책을 드려다 보며 눈만 껌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