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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pr 03. 2024

4. 윤동주와 별이와 금자 씨

(소설)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

"우리 지아, 한글 잘 읽나?"

금자 씨가 핸드폰을 드려다 보고 있는 지아를 향해 책을 한 권 내밀며 말했다.

"말은 그대로 쪼매 하는 것 같은데, 글씨도 잘 읽나?"

동주는 고개를 가로졌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여기서 할미랑 살라믄 그래도 한글은 읽을 줄 알아야 쓴디. 할미가 한글 좀 갈차주끄나?"

"응"

"이탈리아에서는 할머니를 뭐라고 부르지?"

"논나..."

"논나? 할머니가 논나라고? 여기서 논나는 '어여 논나~'인데. 하하하 아이고 웃기다이. 할매 논나~ 할매 나하고 논나~ 하하하 말이 진짜 웃기다이."

지아는 금자 씨가 왜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논나인데 그게 왜 웃기다는 걸까?

"그라믄 할아버지는 뭐라고 부르고?"

"논노..."

"논노? 어이 논노~ 논나논노~ 거 참 재밌네. 허허허"


"지아야 할머니 내일은 저기 읍내에 좀 가야쓴디. 읍사무소에 있는 문화센터에 가야 되거든. 니는 우짜지... 할미랑 같이 갈까? 혼자 집에 있기도 심심할 건데. 가서 할미가 맛난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지아는 곰곰이 생각하다 평소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 떠올랐다.

"짜장면...."

"우리 지아 짜장면 먹고 싶었어? 그럼 할미가 사줘야지. 내일 같이 읍내 가자 가만있어 보자. 엄마 아직 도착할 때 안 되었나? 엄마한테 연락 아직 없제?"

지아는 금자 씨의 말에 동주의 시간을 헤아려보았다. 지아를 금자 씨 집에 바래다주고 이틀 뒤에 바로 밀라노 집으로 떠난 엄마였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가장 바쁜 시기이기에 동주는 한국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뒤로 물리고 발길을 재촉했다. 가장 싼 비행기 표를 끊고 갔으니, 밀라노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6시간이나 남았다.

"아직."

"근데 지아야, 이탈리아 말에는 높임말이 없나? 어른들한테 하는 말 말이야."

"아, 있어요."

"아 그래? 여기 한국말에도 존댓말이 있거든. 할미한테 반말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어른들 만나면 꼭 "요"를 붙이는 게 좋아. 알긋제? 한국말은 엄청 쉬어. '요'만 붙이믄 되거든. 우리 지아는 이탈리아 말도 잘하고 한국 말도 잘하고 영어도 잘 하고, 다 잘하네. 아이고 우리 지아 참말로 멋지다. 멋져."

지아는 난데없는 금자 씨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한번 입을 다물었다.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 틈에 살면 마음이 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언어가 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아는 너무 쉽게 한국행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새삼 후회가 되었다. 벌써 엄마 아빠가 그립기까지 했다.

"하아암. 하이고 벌써 10시네. 할미는 졸려서 먼저 잘란다. 지아는 잠이 안 오나?"

"네."

"그래. 아직 시차 적응할라믄 시간이 쪼까 더 필요하것지? 할미 먼저 잔다. "

"네."

지아는 방으로 들어가는 금자 씨의 뒤를 바라보다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자 씨가 내민 책이 지아의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은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책 표지엔 아무런 단서도 없이 글자만 몇 개 쓰여 있었다. 지아는 책을 펼쳐 보았다. 글자가 빼곡하지 않은 것이 시집처럼 보였다. 지아는 글자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으며 읽어보았다.


"윤... 동... 주... 시...집..."


"동주? 동주는 우리 엄마 이름인데.... 엄마가 쓴 건가? 아 엄마는 박동주지. 시집... 시의 집이라는 말인가...."

지아는 책을 내려놓고 집 밖으로 나갔다. 6월 말의 공기는 꽤 뜨거웠다. 지아는 앞마당에 놓인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지아는 일어나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했다. 철 대문을 여니 끼익 소리가 났다. 문 앞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낑낑거리며 앉아 있었다. 문득 낮에 금자 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 온 강아지인지 요 며칠 우리 마을을 돌아다니더라구. 에이구, 누가 또 놀러 왔다가 갔다 버리고 갔나 보구만. 버릴 거면 뭐 하러 키우나 몰라. 불쌍하게. 이리온나, 밥이나 좀 먹고 가라이."

지아는 웅크리고 앉아 뻣뻣해진 강아지 털을 한번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그런 지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끼잉~ 소리를 냈다.

"배고파? 목말라?"

지아는 주방으로 가서 그릇에 물을 조금 담아서 가지고 왔다. 강아지는 조심스레 물을 핥더니 이네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stella,  네 눈이 별처럼 생겼네? stella 어때? 별이라는 뜻이야."

강아지는 지아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물을 마셨다. 오랫동안 목이 말랐던 것처럼.



"지아야, 10시다. 이제 인나야지. 할미 30분 뒤에 나갈 거야. 어여 인나 아침 먹어~"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지아는 새벽 3시가 되도록 잠들지 못했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얼마 안 되어 금자 씨가 지아를 깨운 것이었다. 지아는 그 소리에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니, 너 왜 또 왔어? 너 진짜 주인이 없는 거시여? 쯪쯪쯪 어쩐다.... 나는 니 못 키우는디.... 어쩌다 우리 동네까지 왔으까이."

지아는 강아지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 할머니."

"응, 우리 지아 일어났어?"

"할머니, 그 강아지 키우면 안 돼?"

"응? 키우자고? 얘를? 무슨 병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째 키운다냐."

"내가 키울게."

"니가 어떻게 키워. 너도 몇 달 뒤면 갈 거잖어."

"내가 키울게. 응? 할머니, 내가 키울게."

그동안 말도 별로 없고, 멍하니 핸드폰만 보고 있던 지아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하니, 금자 씨는 잠시 고민이 되었다. 얼마 전에도 떠돌이 강아지를 데려다 키웠지만,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었기 때문이었다.

"강아지 주인이 버리고 간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디.... 근디 강아지가 뭔 죄겄어. 강아지도 가족인디 버리고 간 놈들이 나쁜 놈이지. 그지?"

"할머니 그럼 스텔라 키워도 돼?"

"옴마, 벌써 이름도 지었어? 언제 둘이 만났데? 스텔라? 이탈리아 이름이여? 그게 무슨 뜻인디?"

"별"

"별? 옴마야 이름도 이쁘네. 별이야, 이제 할미랑 지아랑 같이 사끄나?"

지아는 그 말에 벌떡 일어나 할머니를 껴안았다.

"그라찌에 밀레, 미아 논나!!"

"뭔 말이여. 고맙다는 말이여? 하이고 나도 고맙네. 우리 지아가 이리 기뻐하다니. 아차차, 지아야 언능 밥 묵어. 할미 읍사무소 가야 돼. 오늘 문화센터 가는 날이여."

"응, 아니 아니. 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지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금자 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주 보지 못해 서먹하기만 한 손녀는 어느새 키가 껑충 커 있었다. 생긴 건 딸, 동주랑 똑같지만 성격은 사위 경석을 닮은 것 같아 영 불편했다. 말이 사위지,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이인 데다가 성격도 서글서글하지 못해 만나면 어색하기만 했다.


벌써 15살이 된 손녀와 어떻게 지낼지 고민되었던 금자 씨는 딸 동주의 사춘기를 떠올렸다. 동주도 꽤나 시끄러운 사춘기를 보냈었다. 하지만 금자 씨는 그런 동주를 묵묵히 받아주며 바라봐주었다. 아마도 동주는 지아에게도 그런 눈빛과 시선을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눈 감고 간다, 윤동주《하늘과 별과 바람과 詩》 에 수록



금자 씨는 지아와 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단조로웠던 자신의 삶에 지아와 별이가 씨앗이 되어 성큼 들어와 꽃을 피워내는 것 같았다. 동주에게 그랬던 것처럼 눈 감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걸어볼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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