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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02. 2020

11. 카레의 비밀

[소설] 셀 게스트 하우스의 비밀

배가 불룩하게 나온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 말로 말을 했다. 그의 바지는 볼록한 배 아래쪽에 아슬아슬 걸쳐있었다. 안비가 그 남자의 말을 받아치며 핑퐁게임 같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설화는 팔과 다리는 가는데, 배만 볼록 튀어나온 그 남자가 올챙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작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에어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던 바지와 셔츠 사이로 그의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

설화는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비가 오나 봐.”

“네. 요즘 날씨가 좋지 않죠. 몬순이라 그래요. 계속 그럴 거예요. 이 사람이 그러는데 에어컨 배수구가 막혔대요. 에어컨 청소를 하면 된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고마워, 안비. 그럼 난 다이닝 룸에 있을 게.”

“네.”

 


설화는 올챙이 아저씨와 안비를 방 안에 두고 그냥 나오려다 뒤돌아 서서 검은색 크로스백을 들고 나왔다. 중요한 것은 없지만 여권과 지갑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다이닝 룸엔 존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헤이 존. 마리는 없네?”

“응, 마리는 나갔어.”

“비가 이렇게 오는데?”

“응. 요가 마스터코스가 얼마 남지 않았대.”

“대단한 집념이구나.”

“그렇지. 대단한 사람이야. 멋지기도 하고.”

“그렇구나. 그 사이에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뭐. 그저….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베트남으로 가겠대.”

“뭐라고? 갑자기?”

“응. 이렇게 갑자기.”

“아니 왜?”

“자세한 건 마리한테 직접 물어봐. 뭐…. 베트남에 가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지내겠대. 그건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고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듣지 않아.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렇구나. 정말 대단하네. 그래서 같이 가는 거야?”

“아마도. 난 호찌민으로 돌아가서 다시 일을 할 거야. 마리는 거기서 요가 센터를 알아보겠다던데, 모르겠어. 그러다 당장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할 수도 있지. 뭐, 그녀에게 맡기려고 해,”

“너희 둘, 사귀는 거야? 그러니까 미래를 약속한 거냐고.”

“꼭 사귀어야 하는 거야? 지금은 서로 호감이 있을 뿐이야. 그 이후의 일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니 그런데 베트남을 간다고?”

“그게 그녀의 선택이고, 그녀의 의지야. 하나에 빠지면 물, 불 가리지 않지.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의 그 순간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대. 그래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어.”

“그렇구나….”

 


“선택의 그 순간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다.”

설화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선택을 후회했는지 되돌아보았다. 회사를 그만둔 순간도, 인도로 오겠다고 결심한 순간도, 훨씬 전으로 돌아가서 아빠에게 많이 힘드시냐고 물어보지 못한 순간도.

 

 

강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로 얇은 재질의 붉은색 시폰 원피스가 흔들리며 따라 들어왔다. 설화는 물에 젖지 않은 그들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함께 실내에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순간 설화의 두 볼에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강철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난 방으로 들어가 볼게. 할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봐.”

“그래. 아이언. 오늘 고마웠어.”

그들이 볼을 맞대며 인사를 할 때 설화는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에어컨 일은 미안해요. 미리 세심하게 살펴야 했는데. 내가 없으면 좀 그래요.

아참, 날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사실은 나도 설화 씨를 만나고 싶었어요.”

 

하이 소프라노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설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호수 같은 눈이 설화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옷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꽤 화려하게 보였다. 두 귀에서 반짝이는 작은 큐빅 귀걸이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네, 사실은 물어볼 게 있어서 마야를 기다렸어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 기뻐요.”

“네. 뭐든지 물어보세요. 사적인 질문만 아니면 괜찮아요.”

 

설화는 깊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코로 숨을 내뱉었다. 설화의 방에서 올챙이

아저씨와 안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이 게스트 하우스의 카레가 제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카레 맛과 너무 똑같아서요.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전 정확히 알거든요. 아빠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이 카레를 어떻게 만든 건지.”

설화는 마야의 큰 눈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킬까 봐 애써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서요.”


마야의 큰 눈에 물기가 아려오는 것이 보였다.

“혹시 아버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설화는 순간 당황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아빠의 이름을 물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일은 묻어두고 카레의 비밀만 알아 가려고 했었는데, 그녀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 성함은 이세훈이에요.”

“아, 맞네요. 아버지.”

설화는 마야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말에 얼굴이 얼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마야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왔다.


“아, 오해하지 말아요. 진짜 아버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저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라서요. 미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이렇게 귀한 분을 제가 몰라 보았네요.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설화는 마야의 말을 들으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네. 사실은….

제 어머니는 예전에 어느 한국 회사 기숙사에서 일을 하셨어요.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요리도 하고요. 제 진짜 아버지는 그 회사의 운전기사였어요. 하지만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어린 저를 데리고 나오셨대요. 그런데 먹고 살 일이 갑갑하셨대요. 저를 맡길 곳도 없었고요. 그때 아버지, 아니 이세훈 과장님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해요. 아, 그 카레는 한국 기숙사에서 일할 때 엄마가 만들었었대요. 한국 보스들 입맛에 맞추느라 인도 향신료를 빼고 한국의 재료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했어요.”

마야는 잠시 숨을 고르며 설화를 쳐다보았다. 설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아빠의 모습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세훈 과장님이 한 번씩 인도에 올 때마다 선물을 사 오셨어요. 학용품도 사주시고, 제가 학교에 다닐 때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전 왜 그렇게 도움을 주시는지 몰랐어요. 그냥 좋았고 감사했어요. 그분이 내 진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전 전혀 한국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제가 중학생 때, 큰돈을 주셨어요. 그 돈으로 이 게스트하우스를 차렸고, 전 공부를 더 할 수 있었어요. 전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어요. 엄마는 그저 감사하다고만 할 뿐, 말이 없었어요. 저희 엄마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감정을 잃은 사람 같거든요.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암튼 그 뒤로 그분은 오시지 않았어요.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았죠.”

“아….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15년 전에.”

“아….”


마야의 눈에서 눈물이 똑 떨어졌다. 호수 같은 그녀의 눈에 푸른 빗방울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엄마에게 당장 말을 해야겠어요. 이렇게 귀한 분이 온 줄도 모르고.”

마야는 설화의 손을 꼭 잡더니 이내 1층으로 뛰어내려 갔다. 설화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빠의 비밀은 어디까지일까? 설화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다 고쳤어요. 더 이상 물은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안비와 올챙이 아저씨가 장비를 들고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옆에 있던 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올 챙이 아저씨와 안비가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설화는 순간, 자신의 감정을 들춰낼 누군가가 없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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