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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ug 23. 2020

선을 넘는다는 것

선을 긋다. 마음을 잇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짧은 커트 머리에 이마엔 여드름이 가득하고 뿔 태 안경을 썼으며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 투박한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아이. 여학생의 풋풋함은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바로 사춘기 시절의 내 모습이다.

특별히 큰 반항을 하거나, 사춘기를 심하게 격진 않았지만, 호르몬의 왕성한 변화는 신체와 외모뿐만 아니라 그동안 순둥 순둥 하기만 했던 성격도 변화시켰다.

착했지만, 조금은 시니컬했던 여고시절을 보냈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내 인생에서 가장 반항적인 모습이었다.

항상 인상을 쓰고 다녔다. 이름도 선량한데, 얼굴까지 착해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난 좀 그런 애였다. 착해 빠져서 부탁하면 뭐든지 들어줄 것 같고,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 같은 애들. 한마디로 만만한 애들이다. 그래서 인상을 쓰고 다녔지만, 날 무서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 친한 친구들과 손편지를 써서 주고받는 일이 한참 유행했었다. 나 역시 유행의 흐름에 민감하게 동참했다.

참고서나 문제집을 사면, 그 안에 빈 종이가 들어있었다. 바로 앞표지와 뒷 표지 앞뒤로 빈 종이가 각각 배치돼 있었는데, 아주 예쁜 색깔이었다. 영어, 수학, 국어, 과학, 사회 문제집을 사면 제일 먼저 그 종이를 칼로 잘 오려냈다. 거기다 손편지를 썼다. 매일 교실에서 만나 수다 떠는 친구들이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편지까지 썼던 것일까?  편지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아마도 혼자 짝사랑하던 교회 오빠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짝사랑 전문가였다. 짝사랑만 3년 넘게 해보기도 했고, 고백 같은 건 절대 먼저 해본 적도 없다. 주야장천 짝사랑만 하고 고백도 못 한 채 혼자 살 팔자인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옆에 누워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남편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부러웠던 친구는 바로, 기다란 미술 통을 한쪽 어깨에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여유로운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처럼 컵라면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졸리다는 핑계를 대고 엎드려 잠을 청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의 여유로운 표정 뒤엔 여유로운 주머니도 함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니, 미술 통을 매고 다니는 아이들이 더 많아졌다.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였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정말 그림을 좋아했을까? 그림을 정말 잘 그렸을까?

그 친구들의 그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다. 글씨도 예쁘지 않았고, 손으로 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없었다. 손아귀에 힘이 부족해 매번 물건을 떨어뜨렸고, 물을 쏟았다.  그런 내 손에 물감이나 색연필이 쥐어질 리 없었다.

그림이나 미술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하긴, 그런 영역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다. 수학도 그랬고, 과학도 그랬고, 영어도 그랬으니까.



항상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그건 학생일 때도 그랬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그랬다. 나는 그 선 안에서만 생활을 했고, 감히 그 선을 넘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선을 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선을 넘는다는 것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림을 못 그렸던 게 아니라, 그림을 제대로 그려보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돈이 없어서 꿈을 꾸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꿈을 꾸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선을 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아니라, 아주 작은 용기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선”은 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점과 점을 잇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선을 긋다. 선을 지우다. @goodness


날마다 종이에 선을 그으며 그동안 수없이 그었던 마음속의 선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이제야 선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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