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Sep 30. 2020

 선을 하나 넘다._매일 그림을 그린 이유

선을 긋다, 마음을 잇다.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나보다 2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언니들은 학교에 가고 부모님은 논과 밭으로 일을 하러 가면 나와 동생만 집에 남았다. 마당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동네 사장 나무 아래에서 모래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검정 고무신을 반으로 접어 뒷굽을 앞굽에 넣어 자동차 놀이를 했다. 그렇게 놀고 집에 오면 동생은 졸리다고 했다. 동생을 내 무릎에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며 5살 동생을 재웠다.

오른쪽 맨 끝방은 마룻방이었는데, 온갖 잡동사니가 그 방에 있었다. 난 유치원도 다니지 못했고, 한글을 배우지도 않았지만, 글은 읽을 줄 알았다. 2살 더 많은 언니의 국어책을 달달달 외웠다. 언니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던 때였다.

아무도 없는 한낮의 어느 날, 마룻방 벽에 연필을 들고 글자를 적었다. 삐뚤 빼뚤 서툰 글씨를 적었다.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였던 것 같기도 하고, 동요의 한 구절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것도 아니면, 언니의 국어책에 나왔던, 영희야 안녕, 철수야 안녕이었던가?

그날 저녁, 나보다 7살이 많은 둘째 언니는 나보고 천재라고 했다. 학교도 안 다니면서 글씨를 쓸 줄 안다며 치켜세웠다.


7살의 나는 내가 엄청 똑똑한 줄 알았다. 그래서 8살이 되어 생전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 가게 되었을 때에도 떨렸지만, 기뻤다. 이미 한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7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학교에 간 첫날, 내 짝꿍은 나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리곤 연필로 책상에 줄을 그었다. 책상의 2/3 부분에 줄을 긋고는 그 선을 절대 넘어오지 말라고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부분은 책상의 1/3 정도뿐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책상인데 왜 줄을 긋는 건지, 왜 넘어오지 말라는 건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께 짝꿍을 일러바쳤다.

“선생님, 얘가 책상에 줄 긋고 넘어오지 말래요.”

선생님은 이런 날 보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곤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다. 나는 그런 선생님이 너무너무 무서웠다. 옆에 짝꿍은 더 무서웠다. 난, 억울했지만, 그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동생 역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집에서 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동생은 내가 한 번도 다녀보지 못한 유치원을 2년 동안 다녔다.





엄마의 이야기 말고 다른 글을 써보고 싶었다. 새로운 소재, 새로운 이야기, 남들은 하지 못할 그런 이야기.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은 하지 못할 경험을 해야 했다. 뉴델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되어버렸다.

그 선은 내가 그어놓은 경계가 아니었다. 지울 수도, 치워버릴 수도 없는 강력한 선이었다.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온종일 집안에서 지내는데, 도대체 무슨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던 스케치북이 눈에 들어왔다. 글을 쓴답시고 그림을 소홀히 하고 지낸 지 6개월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펜을 들고 다시 그림을 그려보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선이 고르지 않았다. 다시 선을 긋는 연습을 했다. 다시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쓸 말이 없다면 쓸 말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떤 경험을 만들어 볼까?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경험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뭘까? 바로 그림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다. 좋아하긴 했지만, 기초도 없고, 배운 적도 없었기 때문에 많이 서툴렀다.

날마다 그림을 100일 동안 그리면 그림이 좋아질까? 잘 그리게 될까? 그러면 내가 경험해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날마다 그림을 그렸다.

하루에 두 개 이상을 그릴 때도 있었고, 그날 못 그리면 다음날은 꼭 그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그리며 글을 생각했다. 글을 쓰며 그림을 떠올렸다. 내가 쓴 글에 그림을 함께 올렸다.


조금씩 강하게만 느껴지던 선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이 가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보이지 않는 선을 하나 넘을 수 있었다.

Jaipur, India by goodness  선량




나보다 2살 어린 남동생은 내 조언을 듣고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남자 간호사가 되었다. 지금은 소방 공무원으로 응급구조를 하고 있다.


동생과 자주 연락을 하진 않지만, 가끔 연락해도 언제나 반가운 나의 동생과 나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



동생의 아이들
작가의 이전글 내 삶을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