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Dec 28. 2020

1. 첫사랑의 추억, 봉숭아

아련한 처사랑의 추억

페이스북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000님이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평소엔 볼 수 없는 환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이 녀석이 살아있었구나...


회색 빛으로 흐릿하게 감추어 두었던,

내 생에 가장 투명했던,

하지만 절대 꺼내 보이지 못했던.

아름답게 눈이 부셨던 날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고향은 남쪽 끝, 고흥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산이 많아서 우리 마을은 농촌, 옆 마을은 어촌, 그 옆 마을은 산촌인 곳이다.

지금은 노인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몇 년 뒤엔 고흥군 자체가 사라질 거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아이들이 꽤 있었다.



열세 살이 되던 해, 시골을 떠나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시골을 떠나는 건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가고 싶었다. 농사일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었다.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논과 밭에서 일을 해야 했다. 봄이면 마늘을 심고, 고추를 심고, 모내기를 하고, 여름이면 고추를 따고, 마늘을 뽑고, 밭에서 잡초를 뽑고, 콩을 심고 따는 모든 일이 나에겐 그저 힘겨운 노동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땡볕에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시골 사는 아이들이 다들 비슷한 처지였겠지만, 유독 나만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냇가 하류에서 엄마를 도와 일을 하고 있으면 상류에서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도시에 사는 언니들과 함께 지낸다면, 엄마랑 떨어져 지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빨리 언니들 곁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게 슬펐다.



그 아이는 시골 어느 남자아이들과 달랐다. 여자아이들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지도 않았고, 욕을 하거나 거친 행동도 하지 않았다. 4학년이 될 때 까지도 한글을 못 뗀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 아이는 달랐다. 시골스럽지 않게 똑똑해 보였다고나 할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갔다. 당시엔 나와 같은 시골 출신 아이들이 많았다. 모두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부모를 떠나 상경한 아이들었다.



6학년 여름,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을 맞아 시골에 왔다. 남동생은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고, 나는 부모님을 따라 유자 밭으로 일을 도우러 갔다.

유자 밭은 옆 동네 낮은 산등성이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산에 일을 하러 가는지 작은 가방을 들고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 아이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안녕”

무심하게 지나가다 그 아이가 인사를 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마당 가에 피어있던 봉숭아 꽃과 이파리를 따다가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었다. 소금과 백반을 넣고 돌멩이로 콩콩 찧었다. 손으로 조물조물 작은 공을 만들어 옆에 앉아있던 동생의 작은 손톱에 울렸다. 살짝 힘을 주어 누르면 동생의 손톱에 알맞게 납작해졌다. 미리 준비해 둔 비닐봉지를 돌돌 말고, 미리 끊어놓은 실을 칭칭 감았다. 내 손톱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봉숭아를 올리고 비닐봉지를 감았다.


동생은 답답하다며 하룻밤을 버티지 못하고 빼버렸다. 난 손끝이 간지럽고 찜찜했지만, 그 아이를 생각하며 아침까지 빼지 않고 버텼다. 아침에 일어나 묶어둔 비닐을 빼 보니, 손톱에 빨간 물이 예쁘게 들었다. 손가락 끝에도 주황색 물이 곱게 들어 있었다.

 

봉숭아 물들이기 @ goodness



첫눈이 오기를 내내 기다렸다.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빠지지 않으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까. 그 미신 같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 아이가 나를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첫눈을 기다렸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 아이한테서 편지가 왔다. 사진도 한 장 들어 있었다. 수학여행을 갔다가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키가 훌쩍 자라 있었지만, 얼굴만은 그대로였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중학생이 된 내 얼굴엔 여드름이 잔뜩 나 있었고, 살도 좀 쪄서 예전의 귀엽던 내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내 일기장엔 그 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그 아이의 이름 쓰고 바로 아래 내 이름을 쓴 후, 이름을 숫자로 환산 해 더하기를 해서 말도 안 되는 퍼센트를 구했다.

샤프연필을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만큼 누른 , 하트를 그렸다. 샤프연필이 부러지지 않게 하트 안을 까맣게 색칠했다.

내 어린 시절엔 온통 그 아이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은 우리는 맥주와 새우깡을 사서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 다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순수했던 시골 초등학생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맥주를 마시며 깊이도 없는 삶에 대한 헛소리를 떠들어댔다. 난생처음으로 술에 취했을 때, 술김에  그 아이에게 고백을 하고 말았다.

"야,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아냐?"

 그 아이는 어떤 대답을 했었더라?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 만난 친구라고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랑도 고백도 타이밍이니까.






봉숭아를 떠올리면 그 아이의 미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내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도 함께 떠올라 한참 동안 과거로 과거로 향하고 만다.  

첫사랑의 기억은 봉숭아의 꽃말처럼, 언제나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인가 보다.


그 친구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안부를 물으려다 말았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때 머물러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


내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그 아이도 가족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4. 영원한 행복, 에키네시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