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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Oct 03. 2023

질문 1.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마흔에게 던진 질문

나는 사춘기를 아주 무난하게 보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큰언니는 태산처럼 큰 존재였고, 고3이었던 둘째 언니는 공부하느라 바빴다. 나보다 겨우 2살 많았던 셋째 언니는 대단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고, 나보다 2살 어린 남동생은 오락실에 들락거리다 큰언니에게 걸려 매를 맞는 철부지였다.

 3층짜리 상가 건물의 3층이었던 우리 집에는 화장실 겸 세면실 하나와 작은방 하나, 큰방 하나, 방과  방 사이에 작은 주방이 있었다. 작은방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지내셨고, 우리 다섯 남매는 큰방에서 공부도 하고, 잠도 자고, 격투기도 하고, 서로 벽에 붙어 자겠다고 실랑이도 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울기도 했다. 큰방이었지만, 우리 다섯 남매가 나란히 누우면 빈틈없이 가득 찼다.

이런 비좁은 곳에서 북적거리는 환경은 나의 사춘기를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생과 사를 궁금해하기엔 일상의 허투른 것들이 산적해 있었다. 버스표 10장 살 돈이 부족해 겨우 5장을 사야 했고, 과자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문제집 값에 천 원을 올려 할머니에게 거짓말했던, 먹고 싶은 욕구가 죄책감을 이기던 시절이었다.

우린 가난했지만,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불편했지만, 부끄럽진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닥친 하루 동안 감내해야 할 것들이 워낙 많아서 과거도 미래도 크게 궁금하지 않다.


나는 그때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불확실한 미래는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십 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상상하는 미래는 핑크빛이었다. 어른이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사춘기의 나는 빨리 마흔이 되고 싶었다.

나는 아주 사소한 것들 까지도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노트를 꺼내 읽으며 기도했다. 그중엔 미래의 남편에 관한 것도 있었고, 직업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막연했던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막연한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보험을 꼬박꼬박 넣고,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적금을 넣는다. 아직도 집이 없다는 현실에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주식을 산다. 파란색으로 얼룩진 주식 계좌를 보며, 10대 시절에 가졌던 핑크빛 막연함을 불러 모은다.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된 지금,

좀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과 어쩔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방황한다.

“엄마, 나는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해?”

어느새 사춘기가 된 아이가 나에게 던진 질문을, 사십춘기가 된 내가 받았다. 나는 아이에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가 사랑을 해서 네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교과서적인 대답은 너무 고리타분한 거 아닐까. 그건 내 앞에 놓인 생을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우주적 관점이 아닐까.


진작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았어야 했던 것들 앞에서 머뭇거린다. 그동안 나는 결론을 내리기 힘든 질문을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싫었던 것 같다.  

“그냥 사는 거지….”라고 답하기엔 삶 앞에서 너무 성의가 없다. 이번엔 회피하지 말고 그 질문에 성의 있는 답을 찾아보고 싶다.


어떤 결론이 나오더라도 크게 상관없는 질문들이지만, 답을 품고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일지도 모른다.



마흔에게 던진 질문 1.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종종 사십 대였던 엄마를 떠올린다.

마흔 즈음의 엄마는 고달파보였다. 삶의 목표도, 목적도 없이 꾸역꾸역 사는 인생 같았다. 우리 다섯 남매가 좁은 방에 모로 누워 아웅다웅 말다툼하며 잠을 청할 때 엄마는 캄캄한 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방에 홀로 누워 외로이 잠을 청했다. 눈을 뜨면 들로 나가 일을 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하고, 또다시 들로 나가 일을 하는 삶. 남편이라는 존재가 위로는커녕 의무 위에 한숨이던 삶.

카카오톡이 없던 시절엔 한 달에 한번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을 가야 자식들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엄만 그저 세월아 가라, 세월아 빨리 가라… 하며 살았지. 그냥 버텄제. 그러다 보니 진짜 세월이 이리 빨리 가버렸네. 엄마는 지금이 제일로 좋다. 걱정할 게 없는 지금이 제일로 좋아.”

칠십이 훌쩍 넘은 엄마는 지난 세월을 다시 꺼내 기억하는 것조차 싫다고 했다. 축 쳐지고 메마른 엄마의 피부에 알록달록 무뉘를 남긴 외로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지도 모른 채 엄마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엄마의 미소 속엔 “사랑”의 흔적 또한 깊게 남아있다. 자식의 자식을 향한 그 사랑 뒤로 삶에 대한 여한도, 미련도 없어 보인다.


“엄마는 아무 미련도 없어. 세상 살 것 다 살았지. 이제 하늘나라 갈 일만 남았지. 언제 가더라도 나는 서운하지가 않어.”


엄마는 자식들이 잘 되길 바라며 사셨다고 했다. 힘들고 고달파도 자식들이 잘 자라서 각자의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도록 뒷바라지하는 것이 엄마가 사는 이유라고 했다. 이제는 그 꿈을 모두 이루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한다.


엄마를 보며 우리는 엄마의 목적이 아니라 이유였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엄마 삶의 목적이었다면 아마도 서로 모두 불행했을 것이다.

엄마는 삶의 이유로 버틸 수 있었다. 아이를 위해 힘든 하루를 버티고, 이틀을 버티고, 그렇게 버티다 보니 엄마는 늙었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이유와 목적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인과관계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고리타분한 답일지라도 사랑이라고 밖엔 할 말이 없다.

사랑이라는 행위로 인한 결과물은 우주의 탄생만큼이나 우연적이지만, 경이로운 순간이 아닐까. 나는 그런 부모의 경이로움으로 태어났고, 부모의 헌신을 먹고 자랐으며 내 아이를 경이로움으로 낳았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부유한 삶은 아니었지만, 자매들과 나눈 정은 사랑의 다른 말이었기에 삶을 지탱하기에 충분히 부유했다.



마흔을 지나고 있는 나는,

사랑을 위해,

사랑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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