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에서 공항까지 걷다

by 김삶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쓴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창 밖으로는 커다란 개와 함께 산책하는 동네 주민이 있다. 오랜만에 날이 맑았다. 한국 느낌으로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는 첫날이다. 그야말로 데이원이다. 한국을 가기까지는 11개월이 남았다. 올해는 10개월이 남았다. 발령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9개월이 남았다. 개월수로 따지면 한 자리수로 돌입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흔들리지 않고 남은 시간을 몰입해서 보내겠다. 그것만이 내게 주어진 과제다.

시애틀을 걷다가 제 멋대로 놓인 낡은 슬리퍼를 봤다. 뒷편에는 길에 사는 사람들의 집이 몇 채 있다. 슬리퍼 주인은 어디 있을까. 이 다리가 그의 마당이란 뜻일까. (촬영: 김삶)

기운을 회복했다. 어제는 시애틀 시내에서 시애틀-타코마 공항까지 걸었다. 지도를 찍으니 14마일이 나왔다.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22킬로 넘었다. 5시간 가까이 걸어야 한다.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몽롱한 상태에서 오전을 보냈다. 밖에 나가서 스타벅스 1호점이라도 보고 와야겠다고 결심한다. 호텔 밖을 나와서 내키는 대로 걷기 시작한다. 파이크 플레이스를 가서 시장의 활기를 느꼈다. 적잖은 사람들이 스타벅스 1호점 앞에 줄을 서있다. 나도 첫 번째 여름휴가를 포틀랜드와 시애틀로 왔다. 벌써 1년 반 전이구나. 시간이 빠르다. 자동차를 타고 이틀 만에 도착한 시애틀을 비행기를 타고 금방 왔다. 원하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곁에 돌파구가 있다.


호텔방에 들어가서 짐을 챙긴다. 점심은 대충 전날 밤에 먹다가 남은 닭날개로 때운다. 커피를 마시면서 마음을 정한다. 호텔에서 5시간 걷는다. 오후 2시인 지금 나가면 얼추 오후 7시에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날이 흐리고 추웠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지도앱을 열어서 방향을 잡는다. 걸으면서 내가 살면서 공항에서 시내까지 걸어갔던 경험을 상기한다. 이스탄불에서 그랬다. 도하에서 그랬다. 더블린에서 그랬다.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곳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시애틀을 추가한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시내에서 공항까지 걷고 싶다. 힘이 닿는 한 그렇게 살 것이다.


걸으면서 일에 대해 생각했다. 걸으면서 나와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육체적 노동을 하는 그들의 퇴근길에는 맥주 한 캔이 함께했다. 25온스 버드아이스 캔을 하나씩 든 채 형광색 옷을 입고 다리를 건너는 두 명이 내게 눈인사를 건넸다. 나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전날 밤 세븐일레븐에서 나도 똑같은 크기의 버드아이스를 샀다. 25온스면 750밀리에 달한다. 큰 맥주를 마시고 밤에 나는 뻗었다. 우리의 본질은 같다고 새삼 느낀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맥주 한잔 마시는 게 우리의 삶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계속 걸어야겠다고 느꼈다. 5시간을 걸으며 이런저런 위기를 겪었지만 묵묵하게 헤쳐나갔다. 어제 시계에 찍힌 걸음수는 4만 7천이 넘었다. 오랜만에 나의 야생성을 확인했다. 몸과 마음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날이 맑다. 봄이 오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한 번씩 맞이하면 새로운 곳에서 삶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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