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팔목이 제법 얇아졌고, 나는 그게 서러워서 한참이나 콕콕 찔러보다가 영월로 내려가는 막차를 놓쳤다. 결국 우리는 첫차를 기다리며 해가 뜰때까지 홍대 거리를 돌고 돌다, ‘이러다 내일 일어나면 다리에 알이 배기겠는데?’라고 생각했고, 경험으로 터득한 예상은 높은 확률로 현실이 되어 지금의 나를 쩔뚝거리게 만들었다.
어제 우리의 단어는 ‘박제’였다. 마지막 장면이 박제되어, 추억으로 박제되어, 머릿속에 박제되어. 박제가 떠올랐던 이유는 은희경 선생님의 소설 <새의 선물>에 나오는 한 장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친구와 함께 밤을 지새운 밤과 새벽은 내 기억에 박제 되었다.
친구는 내게, ‘왜 윤동주나 김영하나 박준은 아저씨라 부르고, 은희경이나 김애란이나 정세랑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냐?’란 질문을 했고, 나는 그럴싸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어니언링을 케찹에 찍어 먹었다. 케찹인지 케첩인지 캐챕인지 모르겠지만, 맛을 보면 우리는 모두가 같은 걸 떠올리기 마련이다.
첫차는 아침 7시에 청량리에서 출발할 예정이고, 우리는 6시가 되기 전에 떠돌던 홍대에서 인사를 나눴다. 떠나갈 때 뒤를 돌아보는 건 간지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서로의 뒷모습은 확인하지 않았다. 어젯밤 <새의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허석은 뒤를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견에 친구와 내가 격렬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아침 6시에 지하철을 탔는데 이미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광경을 보자 조금 슬퍼졌고, 내가 풍기는 술냄새가 타인에게 불쾌함을 불러일으키진 않을까 싶어 호흡을 조금 줄였다. 사람들은 내리고 탔다. 타고 내렸다. 해가 뜬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타고 내림은 끊이지 않았다.
7시에 출발한 강릉행 기차는 세 시간이 지나서야 나를 집에 데려다 놓았다. 허리가 아팠고, 골반이 아팠고, 엉덩이가 아팠다. 오는 내내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는데, 에어컨이 너무 추워서 깼고, 아랫배가 아파서 깼고, 자다가 방구를 낀 것 같아서 깼다. 깰 때마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아직 도착까지 한참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다시 눈을 붙였다. 어느 역부터는 ‘푸하하!’, ‘씨발!’, ‘존나!’라고 떠드는 학생들의 소음에 잠이 깼고, 그 다음엔 ‘거기 학생들! 조용히 좀 합시다!’라는 어떤 아저씨의 호통에 깼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전 10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서점 오픈은 12시인데, 도저히 오픈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피곤에 지친 상태라 급하게 인스타그램에 휴무 공지를 올렸고, 그 뒤로 쏟아지는 잠을 거스름없이 받아드려 기절했다.
잠은 나를 전쟁터로 인도했다. 꿈은 선명했고, 나는 어느 전쟁터의 통신병이었다. 여기저기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아무도 적이 누구인지 몰랐다. 실체 없는 적과 싸우는 전쟁터였다. 우리를 통솔하는 대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네이버 웹툰 <신을 죽이는 방법>에 나오는 ‘자본주의의 신, 캐피탈리즘’이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참호에 숨어 있는 내게 그가 소리쳤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그의 호통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자, 옆집인지 윗집인지 공사를 하느라 쾅쾅거리는 소리와 따다다닥! 하며 벽을 뚫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 잠든 지 네 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인부들은 어째서 낮에도 사람이 자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까.
그렇게 더 이상 잘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자 결국 할 수 있는 게 없던 나는 주섬주섬 준비를 해서 서점으로 왔다. 휴무 공지를 지우고 다시 오픈 공지를 올렸다. 서점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가만히 앉아있자 꿈에서 우리의 대장 캐피탈리즘이 내게 소리쳤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라는 고함이 다시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래, 나는 지금 잠을 잘 때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본격 임시휴무날 임시오픈한 이유의 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