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현실적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들에게 자유를 줘도 될까?'
가장 먼저 들었던 의문이다. 허나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뒤따른 의문에 먼저 먼저 고민을 해야될 것 같다.
'그들은 갇혀도 되는가? 억압당해도 되는가?'
정신병원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이들을 감금하고 억압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심리적, 화학적 치료를 한다. 또는 치료가능성 없는 이들을 격리시킴으로써 그들 및 정상인들의 안전을 지킨다.정신병원의 기능과 역할은 (나의 관점에선) 이리 쉽게 답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그들을 우리들과 다르다 구분짓고 다름의 영역안에 묶어둘 수 있는가, 무엇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가에 대해선 곧바로 답하기 어렵다.
지난 번 다른 기회를 통해 자유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다. 지금은 그때완 달리 자유를 박탈당해도 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지, 안전성 및 안정성을 위해 자유를 빼앗아도 될 지에 대한 고민하고 있다. 개인이 해당 개념에 내리는 정의는 굉장히 중요하다. 사고가 뻗어나감에 있어 지표역할을 하거니와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난 간과하고 있었다. 정의도 중요하지만 그이후의 문제들 또한 꼭 생각해볼 필요가 있단 것을. 영화 덕분에 다음 과정으로 넘어올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 영화는 주제 측면에서도 좋았지만 특히 연출이 대단했다. 자유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색다르게 표현할 수 있음에 감탄했다. 그리고 인물설정 또한 창의적이었다. 정신병원과 그 곳으로 날아간 범죄자라니...
맥머피는 굉장히 이기적인 인물로 비춰진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거침이 없다. 타인이 받을 고통따윈 안중에도 없다. 내가 즐겁고 편하면 그뿐이다.
그는 감옥에서 정신병원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곳의 억압된 시스템을 망가뜨리고자 한다. 순순히 자신의 자유를 내놓고 스스로 억압에 몸을 실은 자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 갑갑한 곳에 자유를 불어넣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유를 되찾지 못하고 죽는다. 자유를 영영 박탈당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더 이상 고민할 수 없게 된다. 이젠 병원의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 짐작될 뿐이다. 그런 그에게 다시 자유를 되찾아 주는 인디언추장. (죽음으로서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가는 사실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영화의 의미적으로 봤을땐 자유를 되찾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점점 완성되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또다른 영화로는 <쓰리 빌보드>가 있다. 이들간의 연관성이 뭘까. 어쩌면 큰 사건을 조각내어 한 조각마다 이를 다른 측면 또는 다른 감정, 다른 태도, 다른 분위기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진행될수록 관객의 생각과 태도도 덩달아 변화를 겪게 되고 엔딩에 와서는 공허하지만 어딘가 채워짐을 느끼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이 영화는 여러 측면에서 좋았다. 적어도 누군가에겐 평생 기억에 남을 장면까지 선사했다 점이... 아무래도 엔딩신은 한동안 내게 자유의 상징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