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에이 아이(2001)
가족이 될 수 없는 데이빗
데이빗이 가족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데이빗의 가족은 데이빗의 여러 측면 중 위험성을 먼저 인식했다. 이렇게 부정적인 시선이 우선적으로 작용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로봇 산업에 대한 우려, 메카는 인간보다 못하다는 사회의 인식 그리고 메카로 마틴을 대체하려는 데 대한 그들의 죄책감이 긍정적인 시선보다 부정적인 시선을 더욱더 가중한 것이리라.
데이빗을 향한 또 다른 시선
다행히도 모든 이의 반응이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로봇 축제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따듯했다. 그들은 왜 가족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일까?
로봇 축제 현장. 그곳에 모인 이들은 사람의 가치를 우선시했다. 로봇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인간의 가치, 생명의 가치를 드높인다.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축제에 데이빗이 등장한다. 진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살려달라 울부짖는 데이빗을 본 이들은 축제 진행자를 향해 분노한다.
첫째로 이들은 데이빗이 진짜 인간과 흡사하기에 로봇이라는 의심 자체를 거부한다. 특히 데이빗은 그들의 삶과 큰 연관성이 없다는 점, 이들은 그저 즐기는 목적하에 모였단 점이 데이빗을 향한 깊은 생각과 고민, 의심까지는 이어지지 않게 만든다.
둘째로는 우리 인간이 아이라는 존재에게 가지는 기존의 인식이 있다. 우리가 아이를 보는 시선은 어른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더욱 조심스럽고 애정이 실리게 된다. 이런 인식과 자세가 많은 부분에서 내 입장보다는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
엄마를 향한 데이빗의 사랑
개연성을 찾기 어려운 사랑, 한쪽으로 유난히 치우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사건과 영향. 이런 요소가 집약된 사랑은 보기 불편하다. 사실 이는 사랑이기보단 일방적인 집착으로 보인다(물론, 이건 저마다 지닌 사랑의 정의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다). 그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데이빗이 보이는 모니카를 향한 사랑에선 불편함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마 대부분의 이들이 데이빗에게 이입하고 영화를 봤을 것이다(그렇게 보게끔 만들어졌기도 하고). 그런 감상 관점이 인물에 대한, 특히 심리적 이해를 높이지 않았나 싶다. 결국 사랑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데에다 관점과 상황 등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기존의 정의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사랑의 무게도 그렇다. 집착을 사랑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무게 차이가 이 영화에선 모니카가 아닌 데이빗에게로 실린다. 모니카는 데이빗의 사랑을 깨우고 자신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책임이 아닌 유기를 택한다. 프로그램상 데이빗은 모니카를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으나 인간인 그녀는 아픈 마음을 뒤로하고 데이빗을 버린다.
특별하길 바라는 마음
로봇 또는 사물은 기능을 중심으로 보게 된다. 특정 기능을 기대하고 구매한 제품이 고장 난다면 우린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제품을 구매한다. 여기서 특별함을 기대하긴 어렵다. 추억이나 애정 없이는 로봇이든 사물이든 특별해지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내가 특별하다면,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면 그만큼 세상은 나의 가치를 높게 살 것이며 나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버려질 일도 없고 그 버려짐의 우려로 받을 또는 진짜 버려짐을 당함으로써 받을 상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나를 대체할 것이 너무도 많다. 아무리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하여도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눈은 그 사람이 다 그 사람일 터. 이러한 현실을 영화를 통해 더 뚜렷이 인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