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조각
전례 없이 따뜻하다 해도 겨울.
저마다 두툼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대중교통에 서 있을 자리도 부족하다.
할 일을 하고 실수를 수습하며
스러질 듯한 상태로 맞이하는 금요일 저녁.
너무나 가슴 아픈 사고에,
꽉 막힐 듯한 기가 차는 정세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같다.
좀체 그러려니 할 만한 여유가
생길 틈도 없는
조급하고 불안한 상태로는,
평소의 일상도 버텨야 하는 과업이 된다.
피곤한 퇴근길 지하철,
내 앞에 서 있는 어떤 아저씨는
백팩을 뒤에 매고 있다.
사람이 몰릴 때마다
백팩은 얼굴을 때릴 듯 위협적으로 움직인다.
지하철이 교통수단이어서가 아니라
아저씨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들었다가 내렸다가 반복하는 발꿈치.
탁탁거리는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가방은
마치 다른 세상의 물건 같다.
공간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움직임.
열차 소리를 뚫고 들리는
탭댄스 같은 발소리보다
오뚜기 같은 아저씨의 움직임이
월요일 아침만큼 나를 피곤하게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더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게 되면,
괜찮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는 걸까.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빵을 뿌리며 돌아갈 길을 표시하는 것과 반대로,
삶의 조각을 조금씩 잃으며
길을 헤매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다행히 오늘은 어제와는 다르게
내릴 역을 놓치지는 않았다.
제시간에 도착해 바라본
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두 행성.
달과 목성인 줄 알았는데,
별자리 앱으로 다시 보니 달과 토성이다.
내가 생각하고 믿는 어떤 것들도
목성이 아닌 토성이어서
결국에는 더 나아지기를.
어른이 되는 게
어쩐지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도통 괜찮지 않은 금요일 저녁이다.
by개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