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13)
2024년 4월 30일 화요일 (11일 차)
산토 도밍고에서 아름다운 도시 벨로라도까지
어제 산토 도밍고에 도착 무렵에는 정말 걷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어젯밤 침도 맞고, 약도 먹고, 스트레칭도 하고··· 그리고 정말 푹 잤다. 아일랜드 청년의 조언에 따라 일어나자마자 발바닥과 발목, 종아리를 마사지하고, 아픈 부위에 젤도 정성스럽게 발랐다. 상당한 효과를 보이는 것 같아 좋은 기분으로 출발한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하늘은 쾌청하고 맑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둠은 모든 것을 감추려 애썼지만, 결국 1시간여를 걷다 보니 오늘도 등 뒤로 따뜻한 햇살이 떠오른다. 뒤돌아본 하늘과 들녘은 눈부시게 그리고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둠이 이 아름다움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자! 힘들어도 가자. 어제 침 맞은 효과를 믿으며 용기 있게 출발했으나 아쉽게도 5km를 넘어가니 다시 통증이 재발한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여러 조치로 다리가 조금 나았나 했는데 오늘 걸어보니 아니다. ‘There is no other way.(다른 방법이 없어).’ 정말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나의 여건에 따라 즐기면 될 일이다. 강요할 필요도 없고 강요받을 이유도 없다. 그냥 형편에 맞게 가자! "There's no other way!"
터벅터벅 걷다 보니 6.5km를 지나 매우 작고 조용한 이곳, ‘그라뇽 Grañón’이 나온다. 사방이 온통 밀밭, 보리밭, 포도밭인데 그 가운데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테오’라는 카페에서 한참을 쉬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숨이 멈출 정도로, 가슴이 턱 막힐 정도로,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오늘 또 만났다. 맑은 공기, 청명한 하늘, 하얀 구름, 드넓은 보리밭···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오늘의 풍경은 예쁘다 못해 가슴 시리게 아름답다. 나는 오늘 이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 흐르고, 새들은 아름답게 지저귀며, 들판은 풍요롭게 푸르르다. 그냥 이곳에 눌러앉아 살고 싶다. 다리도 아픈데 그만 걷고 여기서 며칠 머물라고 자꾸 유혹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길을 포기하지 않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하고 싶다고 기도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보리밭 사이로 들어갔다. 기도 했으니 자신을 가지고 다시 걷는다.
‘빌라마요르’에 도착해 카페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있는데 내 뒤에 따라 들어온 미국 청년이 말을 걸어온다. 자기는 이 마을에서 자고 넘어가려 한단다. 그러면서 ‘유교’에 대해 질문을 한다. 특별히 한국인의 경로사상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사실 나도 유교에 대해 깊이 알고 있지 못했던 터라 미안한 마음으로 내가 알고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설명해 주었고,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 직접 방문해 보라고 제안하고 헤어졌다.
한참을 걷다 뒤돌아보니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힘 있게 손을 흔들어 준다. "Go for it! (힘내라!)". 내가 다리를 절면서 걷는 걸 안쓰러워했는데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가길 바라며 힘내라고 외쳐주나 보다. 나는 한국식으로 대답했다. "화이팅!"
오늘 도착할 마을 ‘벨로라도’에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선착순 기부제 알베르게(Albergue parroquial de Belorado)가 있다. 나는 일단 이곳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벨로라도 의 모든 잠자리는 동이 난 상태이고 선착순 알베르게 말고는 잠자리가 없는 것이다. 다리 통증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턱없이 걷는 속도가 느려졌는데 선착순이라니··· 하나님은 나를 버린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근육통으로 빨리 걷지 못하면서도 불평없이 걸어온 나를 위해서라도 숙소 하나는 남겨 주시지 선착순 경쟁해야 하는 숙소만 남겨주셨나. 못내 서운했다. 남은 5~6km를 힘내야 한다. 다만 약해진 마음에 지나가는 차만 계속 바라봐진다. “혹시 차가 멈추고 태워주겠다고 하면 못 이긴 척 타야지···”
벨로라도 먼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님!”을 백번은 부른 것 같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보다. 슬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한스럽기까지 했다. 이때, 먼저 간 한국 순례자에게서 전화가 온다. 기부제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며 천천히 와도 된다고 한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걷고 또 걸어도 남은 1km는 줄어들지 않는다.
드디어 도착! 알베르게는 성당 한쪽 벽에 지어진 숙소였다. 가장 먼저 내 앞에 놓인 가방 숫자를 헤아려본다. 하나, 둘, 셋··· 가방 숫자를 세려 보니 이 숙소 침대 수 보다 적다. 오늘 여기에 잘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제 알베르게가 열릴 때까지 성당 앞마당에서 기다리면 된다.
안도와 평안한 마음으로 성당 앞 의자에 앉아 알베르게가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밥 & 테라 부부가 지나간다. 반가운 마음에 포옹해 주었는데 테라 부인은 “우리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어”라며 기념사진 촬영을 제안한다. 나도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남겼다.
벨로라도라는 마을의 이름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Bello’에서 알 수 있듯이 작지만 참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고, 골목길에는 유명인들의 손과 족적을 동판으로 만들어 심어 놓았다. 마을 식당들도 아기자기했고 음식도 맛있었다.
이 마을에는 내가 보고 싶었던 벽화가 있었다. 어느 날 유튜브를 봤는데 가슴에 무언가 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이 너무 인상적이었고 강렬했으며 나를 부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벨로라도에 도착하고 보니 알베르게가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 앞마당에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너무 기뻤다.
이 마을에 묵어가는 한국 사람들끼리 연락이 되어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한국 순례자들 사이엔 등갈비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이 있다. 우리는 순례자 메뉴와 ‘폭립’을 추가로 주문했다. 누군가는 인생 최고의 폭립이었다고 좋아했고 나도 맛있게 먹었다. 더군다나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국 아주머니들이 너무 많이 시켰다며 음식을 넘겨주어 음식이 넘치도록 풍성했다. 모처럼 한국 회식 분위기 속에서 다리 아픈 것조차도 다 잊어버렸다.
숙소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4월의 마지막 날이다. 열 하루를 걸었으니, 무언가 답을 얻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 걸어오면서 통증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외쳐 불러보았지만 아직 아무런 음성도, 깨달음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응답’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오늘 걸어오며 본 낙서 하나가 나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Most of the time when you don't get answer. It's because you didn't find a good question.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아직도 답을 얻지 못했다면, 그건 제대로 된 질문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 오면서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드리면서 왔다. 그런데 아직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한 것이다. 왜 대답을 안 해 주실까? 낙서를 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다.
내가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오늘의 낙서처럼 제대로 된 질문을 통해 정확한 응답을 만나야겠다.
이제 자야지 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어떤 질문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그럼 어떻게 질문을 드려야 할까?
https://youtu.be/sz8J9FBexk0?si=HEu7x8F62EFypP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