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보니 오래도록 지속해오던 것을 뚝 그만둔 채 잘도 지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것은 하고 싶어도 도저히 계속할 수 없어서, 어떤 것은 지속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해서, 또 어떤 것은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서 등 이유는 다양하다. '모든 것에 하나 같이 다 명확한 이유가 있다는 것'과 '그만두고 나서 삶의 레벨이 상승했다는 것'이 한결같이 공통된 점이다.
1. 메이크업을 고치지 않는다.
외출을 할 때는 꼭 화장품 세트를 갖고 다니면서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울을 보고, 번진 부분이 있으면 고치고, 바르곤 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인가부터 메이크업을 고칠 도구 같은 것은 휴대하지 않고 조그만 거울과 입술 건조 방지를 위한 립밤만 갖고 다닌다. 메이크업을 '고친다'는 행위가 불필요해졌다. 하루에 한 번 했으면 그걸로 되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메이크업을 '한다'는 행위도 불필요해질 날이 오려나.
2. 콘택트렌즈를 끼지 않는다.
콘택트렌즈를 스무 살 즈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 약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착용해왔지만 이제는 그만두었다. 책을 읽거나 웹 서핑을 할 때 콘택트렌즈로는 30분 이상 집중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워진 시점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자연스레 안경이 나의 절친이 되었고 안경 없이는 삶의 질이 곤두박질친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기로 했다기보다는 '포기'의 영역에 속한다.
3. 새벽 한 시가 넘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인 나는 밤이 깊어질수록 영혼이 차오르는 사람이었다. 나의 젊은 날들의 밤은 반짝이며 잠으로부터의 유혹을 너끈히 쫓아버리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이제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꼭 잠이 들지는 않더라도 새벽 한 시가 가까워오면 일단 몸을 뉘어야 한다. 가끔 새벽 한 시를 넘길 때도 있지만 그다음 날의 저질 체력을 몇 번 경험하고는 눈물을 머금고 내 안의 올빼미를 버렸다. 밤을 버티지 못하는 올빼미는 더 이상 올빼미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대신 새벽형이 되어보자며 야심 찬 계획을 세웠으나 그것도 무리였다. 도저히 안된다면 아침형 인류로라도 어떻게 편입하면 좋겠네, 싶었지만 아침에는 뇌의 정중앙에 짙은 안개가 끼어있는 듯 명료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삶에서 영혼이 차오르는 시간이 줄어들어버렸다고나 할까. 그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4. 도저히 흥미가 가지 않는 영화는 끝까지 보지 않는다.
다른 영상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영 흥미가 가지 않는 영화를 장시간(무려 한 시간이 넘게!) 참고 앉아서 보기에는 내 소중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집중하느라 영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나 대담 같은 것은 그나마 낫다. 다 재밌다며, 감동해서 울었다며 입을 모아 칭찬하는 <라라 랜드>를 보다가 너무나도 지루해서 도중에 그만두었다. 이것은 집중력의 문제일까 취향의 문제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영상물 전문 난독증이라는 병명도 있는 걸까. 온갖 고민을 해보다 결론은, 너무 애쓰지 않는 것으로 했다. 흥미를 느낄 수 없는 것에 시간을 고정시키고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
5.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애써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다.
그대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려는 노력을 그만뒀다. 그저 의례적인 예의만 갖출 뿐 관계를 확장시킬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아마 그쪽 역시 나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로지 그 한 가지 마음만은 통하고 있는 것일까. 살다 보니 그런 경우를 꽤 자주 마주친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드물어진다. 마음 맞는 사람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할 시간도 부족한데 굳이 맞지 않은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있나. 마음의 맨 아랫부분에 이런 생각이 자리하기 때문일 터. 취향이 맞지 않는 영화를 꾸역꾸역 보는 것을 포기한 것과 거의 같은 이유다.
6. 화려한 색의 옷을 입지 않는다.
이전에는 때로 아주 진한 원색의 옷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고,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옷들도 잘도 입고 다녔었다. 지금 옷장 안 옷들은 블랙, 화이트, 그레이, 베이지, 브라운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채도가 조금 높은 것들을 내 몸에 걸치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앉아있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보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알록달록한 색이 어울리는 건 어린아이들 뿐이지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무채색의 칙칙함이 주는 편안함과 여유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지 않음'이 좋아졌다. 조용히 주목받기 좋아하는 취향에 딱 맞아들었나보다. 전문용어로 '조용한 관종'의 취향이랄까요.
7. 굽 높은 신발을 신지 않는다.
한 때 하이힐을 신고 왕복 세 시간에 걸친 만원 전철 출퇴근도 했다는 사실이 오래전 꿨던 악몽처럼 느껴진다. 하이힐을 신을 때마다 사람이 된 인어공주의 기분이 되곤 했다. 사랑을 위해 지느러미를 버리고 사람의 다리를 갖게 된 그녀. 걸을 때마다 살이 찢기는 듯 날카로운 통증을 느껴야 했던 그녀 말이다. 힐에 발을 구겨 넣은 채 아픔을 참고 걸으며 이것이 바로 인어공주의 숙명이려니 생각했지만 어느 날 문득, 더는 인어든 공주든 하고 싶지 않다! 는 기분이 들었다. 굽 높은 신발들을 신발장에서 전부 퇴출시켰다. 이제 내 신발장에 입성할 수 있는 굽의 최대 높이는 2.5센티. 높은 굽을 인생에서 퇴출시킨 대가로 키가 자랐다면 좋았겠지만 대신 나는 자유를 얻었다. 인어공주를 벗어나 비로소 낮은 굽으로 세상을 걷는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8. 유행하는 음악은 듣지 않는다
유행하는 음악과는 이별을 고했다. 국가적으로 혹은 글로벌하게 히트를 하는 인기 뮤직들과 나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고 그 장벽은 그다지 먹고 싶지 않은 죽으로 되어있어 죽을 다 먹어치워야 장벽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대신 소리의 공백은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 세계를 강타한 재즈와 클래식을 찾아 채워 넣는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온갖 고전 음악들을 찾아 듣기 좋은 시대가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키워드'만 있다면 어느 음악의 방이든 들어갈 수 있다! 한철 듣기에만 좋은 음악을 들을 여유는 없다고 할까.
9. 그럼에도 여전히 고집하는 것들
짜장면과 짬뽕 중 무조건 짜장면이다.
이건 할머니가 되어도 불변이다. 사람은 어릴 적 먹은 음식의 기억으로 남은 어른의 날들을 참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짜장면을 먹는 날은 늘 '신나는 날'이었다. 그 기억이 내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어있어 짜장면을 먹으면 그날 그때처럼 밑도 끝도 없이 들뜨나 보다.
여름용 샌들을 꺼냄과 동시에 페디큐어를 한다.
페디큐어를 하지 않은 채로 샌들을 신으면 아무런 준비 없이 맨 얼굴로 가방도 없이 터덜터덜 외출한 기분이 된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을 걸을 때 샌들 속에 담긴 페디큐어 한 나의 발끝에 햇빛이 닿아 반짝반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설거지는 맨손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특히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일이 반복되면 손이 미워지고, 뿐만 아니라 트러블이 생기는 체질이라서이다. 덧붙이자면 페디큐어를 하는 발끝과 달리 손톱에는 아무것도 칠하지 않는다. 하루만 있으면 벗겨지는데 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는지라. 그저 설거지를 맨손으로 하지 않는 것이 손 관리의 시작과 끝이다.
베스트셀러 책들은 바람이 지나가면 읽는다.
읽고 나서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책은 집어 들지 않는 버릇이 있다. 베스트셀러 책을 손에 들고 읽는 느낌이란 마치, 유행하는 옷을 입고 외출했는데 100미터 전방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걸어오는 사람과 마주치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그렇다고 아예 읽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고 베스트의 자리에서 내려가면 그때 주로 읽는 편이다. 바람이 다 지나가고 누구도 찾지 않을 때 한 귀퉁이에 묻힌 책을 들고 읽는 재미도 그럭저럭 괜찮다.
줄임말과 신조어는 쓰지 않는다.
분명 편견이겠지만 신조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을 보면 외계어를 쓰는 외계인을 보는 듯 낯설다. 사자가 풀떼기를 바라보듯 신조어와 유행어를 바라보게 된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 신조어가 더 이상 신조어가 아니게 될 때 그 익숙함 위에 숟가락을 슬쩍 얹어보기는 한다. 천성이 얼리어답터가 되기엔 아무래도 무리다.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간다고 한다. 또 십 년 뒤의 나는 무엇을 그만둘 것이며 무엇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을까. 무엇이 되었든 다만 바라기는 씁쓸한 포기가 아닌 불필요한 것들을 처분하는 털어내기가 될 수 있기를,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