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시간이라는 파도 위를

by 해처럼


자신이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것들을 지속적으로 붙잡으려 하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거다. '뭐든 더 많이' 붙잡으려 하는 것보다야 훨씬 담백하다. 많은 걸 원하는 게 아니잖아! 를 외치는 이면에는 빼앗기는 설움이 스며있다.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기는 체험의 대표 선상에는 '젊음'이라는 것이 있다. 겨울을 앞둔 나무들이 서서히 낙엽들을 떨구듯 우리는 매일 한 줌씩의 젊음을 길바닥에 흘리고 살아간다. 젊음이라든가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딱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이를테면 능숙이라든가, 지혜라든가, 노련함이나 현명함 같은 진귀한 것들 말이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으로는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팬데믹 상황을 심리적으로 잘 견뎌냈다고 한다. 힘든 쪽은 오히려 어르신들일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거리두기로 인한 고립감을 못 견뎌했으며, 상대적으로 나이 든 사람들은 고립감도 지루함도 오히려 덜 느낀다고 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원치 않는 만남은 피하고 마음 편한 사람들만 자연스레 친구로 남으니 거리두기라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나이가 들면 지루함이 줄어든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어르신들이 혼자 있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괜히 쓸쓸해지곤 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오히려 그분들을 왜곡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어쩌면 남은 하루하루들에 고마워하며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펜데믹 피크의 상황에서 길거리에서 만난 할머니를 기자가 인터뷰했는데 어르신은 이렇게 말했다.



"난 전쟁도 겪었어. 지금은 행복한 거야. 그래도 집은 남아 있잖아."



전쟁을 비롯해 온갖 풍파를 겪었을 어르신은 '집콕'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할 조건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에 나도 위로를 얻었으니 노년의 능숙함에는 역시 힘이 있구나.


©2021 해처럼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무엇을 추구하고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를 규정해가는 것.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수정해가는 것. 포기할 건 포기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꿋꿋이 지켜가는 것. 그렇게 자신의 품위를 만들어나가는 것.



공식적인 나이의 파도는 어김없이 올해도 밀려왔다. 작은 물결들이 모여 파도를 이루듯이 숫자의 파도 역시 자잘한 시간의 물결이 모여 큰 파도를 이룬다. 한 두해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닌데 그 파도에 파묻혀 비명을 지를 것이 아니라 파도를 타고 질주하는 서퍼의 마인드로 바라보는 것도 괜찮지 않으려나. 시간이라는 바다의, 나이라는 파도 위를 서핑하는 추상적인 서퍼가 되는 것이다.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여 나이의 파도가 더 크게 밀려와도 굴하지 않는 최고의 서퍼가 되어야지.









©2021 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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