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항상 내 감정의 중심에는 '불안'이 있었다. 삶의 다양한 상황들과 장소에서 나는 늘 불안을 짊어지고 살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오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발표를 앞두고 있으면 차례가 돌아오기 직전에는 손이 떨리도록 불안했다. 깜빡 졸거나 해서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지나칠까 봐 불안했고, 발표를 할 때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까 봐 불안했다. 시간에 늦을까 봐 불안했고 결과가 좋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불안은 흰 셔츠 위에 흘려버린 소스 자국처럼 마음에 희미한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그리도 불안하게 했던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날 C.S. 루이스의 글에서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남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C.S. 루이스 <시편 사색> 중에서)
아,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타인에게 맞추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지, 실수를 하면 비웃음을 사게 되지 않을지,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지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쓰며 살고 있었구나. 그리하여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상식적이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능력 있고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오버액션을 하고 마음의 무리를 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들킬까 봐 늘 불안했고 초조했던 것이다. 아무리 애써봐도 결국은 ‘딱 나'인데도, 딱 나만큼의 내가 무얼 하든 줄줄 새어 나옴에도 그걸 막고 감추기 위해 부단히도 동동거렸다.
오래도록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바로 나의 삶인데도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선택과 결정과 평과를 맡긴 채 살아왔다. 기준이 타인의 평가에 놓여있었으니 실체를 들킬까 두려워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모른 채 혹은 외면한 채 사회의 좌표에서 어느 지점인지만을 의식했다. 어떤 사람으로 보일 것인지만을 의식하던 시간들이 부끄럽고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구매했던 핸드폰을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렸을 때 친구는 말했다.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물건을 잃어버려야 하는 법이라는 걸 알아야 해.”
친구의 그 말처럼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해 나의 그 부끄러운 시간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잃어버린 그 시간들'은 이제 달의 뒷면으로 보내도록 하자.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긴 시간 동안 나는 '이름 없는 민초로 돌을 던지다 화살에 맞고 죽어가긴 싫어!'라 외치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혹여 그런 역할이 주어졌다면 장렬하게, 더 폼나게 돌을 던져야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좀 어때' 하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을 자유함이라고 불러야 할지 포기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저 자기라는 존재를 아끼며 보듬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인생이 편집 가능한 것이라면 좋을 텐데. 여기부터 여기까지 약 1시간 25분 정도는 삭제해야겠군, 아예 이 날은 통채로 소멸시키자, 하며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디부터 손봐야 할까.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블러 처리하며 무엇을 복원시키고 덧붙여야 할까. 아무리 둘러봐도 인생 그 어떤 귀퉁이에도 부분 삭제 버튼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들을 편집할 수는 없다 해도 마음을 편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불안이 차지하던 자리 만큼은 비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모든 것들을 삶에서 풀풀 다 털어내어 비우고 나면 하나가 남는다. 어쩔 수 없다. 그것 만큼은 떨어져 나갈 수 없이 삶과 완전히 밀착되어 있다. 짐작했겠지만, ‘사랑'이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모티브이고, 동력이고, 이유이고, 목적이다. 사랑이 없는 상태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인간에게는 공기, 물고기에게는 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공기가 없으면 죽을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이 없으면 죽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다가 귀결되는 존재다. 너무 흔해 빠져 식상한 단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단어가 품고 있는 뜻이 그 단어 자체보다 훨씬 더 크다. 우주가 지구보다 큰 것처럼. 사랑이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동력임은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분명하다. 식상하고 진부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때로는 클리셰가 우리를 구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