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어김없이 커튼을 열고 '창문 하기'를 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누군가가 선을 그은 것처럼 하얗고 긴 날이었다. 자동차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니고, 사람들도 천천히 걸어 다니는 평온한 일상이 창 밖에서 가만가만 흐르고 있었다. 자전거도 종종 지나다녔다. 자전거 바구니에 푸른색 화초를 싣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새로운 화초를 사서 집에 가는구나, 잘 키우시길, 생각하다 자세히 보니 푸른 것은 화초가 아니었다.
대파였다. 빛난다고 다 금이 아니듯 푸르다고 다 화초는 아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대파도 역시 화초는 화초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의 차이일 뿐. 최초로 파를 먹기 시작한 그 누군가에 의해 파는 화초가 아닌 음식이 된 것일 뿐이었다. 대파는 생각할수록 독특한 식물이다. 뿌리 쪽에 가까운 줄기의 색은 희고 뿌리에서 멀어질수록 푸르다. 흰 줄기가 푸른 줄기로 바뀌는 지점의 색은 미묘하다. 파는 무침을 해서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국에 넣어 우려내어 먹어도 맛있다. 불에 구워도 맛있고 파전을 해도 맛있다.
하지만 대파는 어른의 음식이다. 어린 혓바닥은 대파의 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부하며 뱉어낸다. 대파가 맛있게 느껴질 때 비로소 어른의 입맛을 갖게 되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어떤 통과의례로서도 아니고, '사춘기 이후부터 2~3년 내로 대파가 맛있어짐'이라는 식으로 공식 통계가 나와있는 것도 아니다. 대파가 맛있어지는 순간은 그저 문득, 어느 날 불쑥 찾아온다. 마치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느닷없이 대파가 맛있어진다. 이런 맛이었어? 왜 때문에 싫어했던 거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하며 상추에 고기를 넣고 파무침을 잔뜩 올려 입안에 넣는다. 그 순간이 바로 어른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서는 지점이다. 어른 인식의 첫 번째 도어다.
어른이 아닐 때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자 실은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어른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을 당당히 하면서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 = 어른'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어른이라면 우리들의 주변엔 여전히 어린이들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파는 맛있다. 대파가 맛있어지는 운명의 순간을 딛고 나는 어른이 되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책임이라는 그림자가 뒤따르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대파가 맛있어져 버린 그 지점을 넘어선 자에게 주어지는 운명의 장난이다. 자전거 바구니에 실린 대파는 그날 저녁 식탁에 올라 어른의 입맛을 달래주었을까. 어쨌든 우리는 대파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대파 없는 고기쌈을 상상하기는 곤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