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본질의 시간

소소하게

by 해처럼

왜 아이의 자는 모습은 언제나 열세 살의 모습이 아니라 세 살 남짓 그 무렵의 얼굴이 되는 걸까. 내가 이 아이의 엄마라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마법에 걸려 할머니로 변한 소피가 자는 동안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누구든 자는 동안에는 그 사람의 ‘본질’로 돌아오는 건 아닐지. ​자는 동안은 거짓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 마법에 의해 할머니로 변했지만 잠자는 동안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소피



고딩시절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가 일박을 했다. 그 아이는 반에서 오락부장을 도맡아 하던 아이였는데 귀엽고 웃긴 아이였다. 한창 수다를 떨다 잘 시간이 되어 잠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눕기 전에 머리를 곱게 빗고 나름 어여쁘게 단장을 하고는 눕는 것이다.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친구는 말했다.

"자는 동안 왕자님이 올 수도 있으니까 예쁘게 하고 자야 되는 거야~."

친구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나는 잠시 잠이 오지 않아 어둠 속에서 멀뚱 거리던 기억이 난다. 자는 동안 왕자님인지 뭔지가 오면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다. 왕자는 딱 붙는 레깅스를 신고 엄청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올까? 잘생겼을까? 도대체 왜 밤에 왕자가 오는가, 밤에 오면 도둑인데. 친구는 그런 종류의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많이 읽었던가보다. 지금은 소식이 끊긴 그 아이는 꿈에 그리던 왕자를 만났을까.





잠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사람뿐 아니라 식물도 물고기도 모든 동물들도 다 잠을 잔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할수록 뭐라 말할 수 없이 신비롭다. 애니메이션 <월 E>에서 로봇인 월 E가 잠을 자는 모습도 있었으니, 로봇들도 잠을 고려하여 설계하지 않을까.



잠은 밤의 영역만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언제건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잘 수 있다. 아침에 얼굴에 났던 뾰루지는 자고 난 다음 날이면 사라져 있기도 하고, 어느 날 문득 눈을 떴을 때 어딘가 몸이 이상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대부분의 치유는 자는 동안 이루어진다. 잠을 경계로 언제고 무엇이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잠의 반대급부에 '불면증'이 있다. 자신 쪽에서 잠을 밀어내는 것인지 잠 쪽에서 자신을 밀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 역시 생에서 두 번 정도 호되게 불면증을 앓은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으로 불면의 밤은 검지 않고 하얗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잠>이라는 단편소설에는 불면증을 겪는 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참으로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 단편집 <TV피플>에 실린 소설로 아주 정확하게 그 폭력적인 불면의 상태를 묘사한다.



나는 차라리 이대로 엎드려 푹 잠에 빠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 각성이 언제나 내 곁에 있다. 나는 그 싸늘한 그림자를 줄곧 느낀다. 그것은 나 자신의 그림자다. 기묘하다, 고 나는 졸음 속에서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졸면서 걷고, 졸면서 밥을 먹고, 졸면서 대화를 한다. (중략) 가족도 친구도 누구 하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내내 졸면서 살아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 나는 말 그대로 자면서 살아 있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잠> 중에서



'각성이 언제나 내 곁에 있다'라는 문장은 불면의 심장을 꿰뚫듯 적확하다. 이것이 잠일까.... 하는 순간 각성이 침범하는 그 경험은 자신이 잠이라는 것에서 가장 먼 끄트머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각성이 나 자신의 그림자라는 것 또한, 내게 찰싹 붙어있는 신체의 일부라는 것도 불면을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위가 아픈 사람이 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아픈 사랑을 하면 심장이 어디인지 알게 되듯 '각성'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 또한 불면을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잠은 하루와 하루를 가르는 절단면 같은 것이다. 잠으로 가른 하루와 하루들이 레고 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여 사람들의 인생을 이루어간다. 그 하루치의 블록으로 무엇을 쌓을 것인가. 다시 밤은 깊어졌고 우리는 본질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자는 동안은 거짓을 말할 수 없고 더 이상 왕자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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