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흘러가는 시간이 불안한 딸에게
여름이 간다. 양 팔이 모기 물린 자국으로 가득하고 겨드랑이가 땀으로 젖었는데도 나는 여름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지말라고 운다. 우리 호캉스도 못했는데 어떻게 헤어져! 못헤어져! 무기력하게 가을을 맞는다. 가을의 찬 기운은 시한부 선고 같다. 시간이 유한하다는걸 잊고 살다가, 정신이 든다. 아 맞다, 시간이 가고 있지.
사실 ‘시간이 너무 빨라’ 카테고리의 하소연은 3일의 한 번 꼴로 누군가에게 하며 살고 있다. 너무 자주 하다보니 웬만한 동병상련형 위로는 동어반복으로 느껴진다. 나에겐 새로운 사람과 대화가 필요했다. 새롭지만 그래도 믿음이 가는 사람. 예상치 못한 정답을 알려줄 사람.
그러자, 송민호가 떠올랐다. 쇼미더머니에서 ‘아버지, 정답을 알려줘!’라고 울부짖던 모습.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지. 바로 가족 카톡방에 들어가, “아버지!!!!!!!” 라는 말주머니를 남겼다. 평소에 나는 ‘아빠’라는 호칭조자 어색해서 잘 쓰지 않는다. 그에게 바로 본론을 반말로 찍찍 날리는 편이다. 그런 내가 무려 아버지라고 외쳤다. 이것은 키보드 워리어에서 파생된 키보드 효녀랄까.
그리고 나는 ‘시간이 너무 빨리가요!!! 어떡하죠???’ 라는 말주머니를 연이어 올렸다. 카톡방은 조용했다. 잠시 후 부르는 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언니가 등장했다. “나우 앤 히어. 오늘에 충실해야지” 요즘 명상 공부를 하는 언니는 나에게 요가선생님같은 말을 했다.
나는 아빠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이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딱 한 번 꽤 진지한 상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대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졌을 때였다. ‘영상미학이론’이라는 과목을 들을 때였는데, 그 때 나는 영화를 해야한다는 신의 부름을 받은 마냥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아빠는 내게 진지하게 한예종을 가든지 어쩌든지 너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 때 아빠에 대한 나의 편견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엄하고 본인의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던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후 아빠는 은퇴후 삶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나를 닮아 예민한 아빠는 많은 밤을 우울해했고 해가 떠 있을 때는 불안해했다. 우리는 같은 약을 먹었고 같은 증상으로 응급실에 갔다. 우리가 이렇게 닮았다는 걸 아주 의외의 증상들로 알게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각자 힘들어하는 삶을 살았다.
“아빠는 네 카톡 안 읽어”
언니가 추가로 말주머니 하나를 더 보냈다. 언니는 내가 안하던 짓을 시도하고도 실망할까봐 기대를 꺾으려는 것 같았다. 언니 예상대로 내 손가락이 어색해지고 있었다. 즉흥적인 텐션이 사라지고 이성이 눈을 뜨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민망해지려는 순간 아버지가 나타났다.
“뭘 어떻게 해?”
아 맞다. 우리 아빠 이런 사람이었지.
“조언을 해주십시오”
아빠의 알고리즘을 움직일 수 있는 입력어를 넣어봤다. “어떡하죠?”라는 물음표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든 사람. 물음표의 절박함보다 명령어의 명확함에 반응하는 사람. 아빠와 딸은 이렇게 다른 동물들이다. 입력값을 넣고 아빠의 반응을 기다렸다.
“시간이 빨리간다는 건 너가 잘 살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다.”
오 역시, 친구들은 해주지 않을 새로운 답변이다. 하지만 썩 납득이 되진 않았다. 어찌보면 전형적인 꼰대의 대답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 [아니, 그건 걱정이 아니다]
[나는 힘듭니다] -> [아니, 너는 힘든게 아니다]
[나는 아픕니다] -> [아니, 너는 아픈게 아니다]
엇, 이건 전형적인 꼰대의 말하기 방식인데? 아빠를 향한 비판론이 머리 속에서 결론에 다다랐을 때, 아빠가 말주머니 하나를 더 건네왔다.
“시간이 너무 안가서 힘든 사람도 있어”
이 말주머니를 한참 쳐다봤다. 갑자기 눈 앞에 아빠가 그려졌다.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느릿느릿 카톡을 치는 아빠. 그 옆에는 우리 강아지가 잠들어있고 아빠는 아주 커다란 볼륨으로 트로트 프로그램을 켜놓고 있겠지. 내가 독립을 하고 싶었던 이유였을만큼 커다란 아빠의 TV소리. 아빠의 시간은 오늘도 느리게 가고.
아빠에게도 오늘은 가을 바람이 불었겠지. 시한부같은 가을 바람이 불고 TV 속 채널의 개수는 유한하고 아빠의 시간은 더디게 가거나 아예 있던 적 없고. 효녀 노릇을 하려던 나의 질문이 아빠를 울적하게 했을까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나의 엄지 손가락은 결국, 이상하리만큼 가벼운 한마디를 던지기로 했다.
“그러니까 아빠, 아빠도 젊을 때 하루하루 소중히 사세요”
나는 이상하게도 역꼰대로 카톡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