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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Oct 23. 2021

득주와 함께

혼자 다시 찾아간 바다, 나의 타투 이야기


그 사람과 함께 갔던 세화 해변에 다시 갔다. 행복의 조건은 함께 있는 ‘사람’이라 줄곧 믿어왔다. 어느 곳에 있느냐 보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는지가  나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무서울만큼 행복하다가도 극악스럽게 외로웠다.



그 사람 덕분에 아름다운 줄 알았던 바다는 여전히 맑았고 바다수영은 사랑스러웠다. 사람은 변해도 어떤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거친 햇빛이 내 어깨와 코끝과 광대까지 바짝 태우도록 내버려두었다. 창백한 내 피부가 까맣게 변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바다 수영을 좋아하는 ‘나’. 비키니를 좋아하는 '나'. 여름을 좋아하는 '나'. 나는 곁에 누가 있든, 아무도 없든 그대로일테다.



가을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9월의 바다는 나를 또 한 번 받아주었다. 수영복을 챙긴 스스로가 기특했다.





수영복을 입은 친구의 팔에 ‘Der Reisende’라는 타투가 보였다. ‘데아 라이젠데라고 읽으면돼. 독일어로 여행자라는 뜻이야. 나는 친구에게 스스로 정말 ‘여행자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몇번 두드리기만해도 부서져 버릴 이미지인지, 아니면 정말 단단한 확신인지 궁금했지만 질문하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란걸 알고 있었다. 누구나 탐낼만한 단어 '여행자'. 그래, 사실 나도 '여행자'처럼 살고 싶었지.



바다수영이 좋은 이유는 간단하다. 수영장에서 하는 수영은 '운동'이라면 바다에서 하는 수영은 '이동' 가깝다. 체지방을 줄이기 위해 하는 유산소 운동이 아니다.   멀리 가보고 싶어서 수영을 하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수영을 한다. 귀가 살짝 아플 때까지 잠수해서 내려가, 해초를 만지고 다시 올라온다. 나는 수영을 통해 움직이고 느낀다. 움직이고 느끼는 . 여행이다.




네 타투는 무슨 뜻이야. 내 오른 쪽 팔에 있는 레터 타투를 보고 친구가 물어왔다. ‘Phulmaya’는 내 네팔 이름이야. 한국어 가르치러 네팔에 갔을 때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이야. ‘Phul’이 ‘꽃’이라는 뜻이고 ‘maya’는 ‘사랑’이라는 뜻이래.




나는 내 이름이 좋았다. 네팔에서도 흔한 이름. 많은 여자 아이들의 이름. 꽃도 흔하고 사랑도 흔하다. 아름다우면서 흔한 것이 얼마나 될까.




나는 왼쪽 팔 뒤에 있는 새로운 타투를 자랑하기 위해 돌아 섰다. 이건 새로 한 타투야. 잘됐지? 내 왼쪽 팔꿈치 바로 위에는 새로운 타투가 하나 생겼다. 두 손이 그려져 있고 쫙 펼친 두 손바닥 위에는 빛나는 구슬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내게 할아버지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 친구의 이름은 오득주였다. 얻을 ‘득’에 구슬 ‘주’. 구슬을 얻는 다는 뜻의 이름.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썩 세련되지 않았지만 곧고 우아한 이름. 친구는 어린 내 손을 구슬처럼 꼭 쥐고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는 내 옷을 차곡 차곡 개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친구 앞에서 재잘재잘 거리는 나는 빛나는 구슬이었다.




그 우아한 이름을 내 몸에 새겼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어떤 날은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바다에 발을 담그자마자, 온 몸이 스산해졌다. 오늘의 바다는 위험한 구석이 있어. 그래도 꼭 수영을 하고 싶어. 서핑 수트를 입은 사람들 옆에서 주섬 주섬 옷을 벗었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내 비키니도 불룩 나온 배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차갑지만 보들보들한 가을 바람. 바다에 들어가는 걸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빨라지지 않아서 마음이 놓인다. 얼음같은 물결이 척추 끝에 닿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럼에도 계속 걸어들어오는 인간에게 바다는 갑자기 친절해진다. 얼음은 녹고 부드러운 포옹.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들어갔다. 깊은 곳에서 5살쯤 된 남자 아이가 튜브를 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이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깊이 잠수했다가 불쑥 올라와서 아이를 놀래켜주는 할아버지. 깊은 곳에서도 아이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도 그 옆에 꼭 붙어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세계를 마음껏 누볐다. 팔꿈치 위에 새겨진 득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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