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내가 망했던 이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다 보면, 본인에게 특화된 장르를 찾게 된다. 처음부터 드라마 작가가 꿈이었던 사람이라면 계속 드라마로 나갈 수도 있지만, 나 같은 잡식 생존형은 일단 돈이 되는 작업이라면 가리지 않고 맡는다. 그러다 유독 사람들이 많이 의뢰하는 분야 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를 발견한다.
내 경우,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 대본을 쓰기 전까지는 글자만 다뤘다. 기존 글의 각색해 달라거나 번역체를 의역체를 바꿔달라는 등, 활자 내에서만 작업을 했다. 꾸준히 유튜브 대본 문의가 오는데도 당시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거절했다. 하지만 GPT가 글을 써 주는 마당에, 점점 일감을 줄어들었고, 그래서 유튜브든 영상이든 뭐든 대본을 쓰지 않으면 수입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간혹 유튜브 문의가 들어와서 작업해주면, 썩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의아했다. 다른 글 작업은 90%의 확률로 만족해 하는데, 유난히 유튜브만 떨떠름한 반응이 돌아오는 게. 그래서 처음에는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고 단가를 아주 저렴하게 잡았다(단가 경쟁이 힘든 이유). 그리고 일단 유튜브를 봤다. 당시 나는 유튜브를 잘 보지 않았었는데, 의뢰인이 레퍼런스로 전달 주는 영상을 몇 편 보다 보면 감이 온다.
일단, 내가 실패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글을 쉽게 쓰기를 좋아한다. '누구는 어렵게 쓰는 걸 좋아하냐'라고 반문하겠지만, 나는 일상에서 쓰는 말과 비슷한 글이 좋다. 두 번, 세 번 읽지 않아도 한 번에 이해되는 문장. 예를 들어, '지면으로부터의 충격을 흡수'라는 말 보다는 '땅에 닿는 충격을 줄여준다'라는 말이 좋다. 달리 말하면, 번역체가 싫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영상 대본을 쓸 때는 오히려 악영향을 줄 뿐이다. 너무 쉽게 풀어서 쓰는 글은 영상에서 그저 흘러갈 뿐이다. 한 마디로, 밋밋한 영상이 된다. 정보를 담든, 스토리를 다루든, 영상에서는 맥을 심어 주어 문장을 끊어줘야할 필요가 있다. 그럼 이 '맥 심기'는 어떻게 하느냐? 동사가 아닌 명사로 한다.
1) 겨울이 되면 성형외과를 찾는 분이 많으신데요. 시험이 끝난 수험생들도 많고, 겨울철에는 시술 후에 상처가 쉽게 덧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성형외과는 겨울이 성수기! 겨울 방학을 맞은 학생도 많고, 상처 관리가 용이해서 환자들이 많이 오기도 하십니다.
1)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식품에도 여러 트렌드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1990년에는 쌀 기능 식품이 유행했고, 2000년에는 유기농, 2010년 웰빙이 가장 검색량이 많은 키워드로 기록됐습니다.
2) 1990년 쌀 기능 식품, 2000년 유기농, 2010년 웰빙.
식품 트렌드는 소비자의 니즈에 따라 매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번은 글감용, 2번은 영상용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오직 활자에 집중하고, 직접 상상을 한다. 그래서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묘사와 비유를 곁들인다. 하지만 영상은 다르다. 일단 시선을 뺏는 영상이 흘러 나오기 때문에 상상을 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뚜렷한 내용 없이 1번처럼 맥없이 흘러 가기만 한다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연히 영상은 지루해진다. 보통 유튜브 영상의 경우, 제목에서 이미 소재와 주제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인트로는 특히 지겹기 마련인데, 곁가지만 건드리는 문장을 사용하면 시청자는 곧장 '뒤로가기'를 누른다.
1) 겨울이 되면 성형외과를 찾는 분이 많으신데요. 시험이 끝난 수험생들도 많고, 겨울철에는 시술 후에 상처가 쉽게 덧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성형외과는 겨울이 성수기! 겨울 방학을 맞은 학생도 많고, 상처 관리가 용이해서 환자들이 많이 오기도 하십니다.
1번과 2번의 차이점은 단어와 도치에 있다. 성형외과의 1번 예시에서, '찾는다', '시험이 끝난', '상처가 쉽게 덧나지 않아'는 이해하기 쉬운 서술어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는다. 글감을 읽을 때는 시작부터 집중해서 읽기 때문에 서술어까지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영상은 다르다. 흘러가던 문장에 맥을 심어 주는 방법은 2번을 보면 알 수 있다.
찾는 분이 많으신데요-> 성수기
시험이 끝난 수험생 -> 겨울방학
시술 후에 상처가 쉽게 덧나지 않기 때문 -> 상처 관리 용이
대본을 쓰면서 이 영상이 끝났을 때 구독자가 '어떤 내용을 기억할 것인가'보다는 '구독자가 어떤 단어를 기억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다. 끊어주기는 두 번째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다.
1)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식품에도 여러 트렌드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1990년에는 쌀 기능 식품이 유행했고, 2000년에는 유기농, 2010년 웰빙이 가장 검색량이 많은 키워드로 기록됐습니다.
2) 1990년 쌀 기능 식품, 2000년 유기농, 2010년 웰빙.
식품 트렌드는 소비자의 니즈에 따라 매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1번은 문장형이다. 어차피 첫 문장에서 '요구에 따라 여러 트렌드가 떠오른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다음 문장에서 시대에 따른 트렌드를 언급할 것이라는 걸 예측할 수 있다. 모든 시청자가 추측하면서 시청하지는 않지만, 이건 본능이라서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199년에는~'이 나오는 순간 지루해 한다.
반면에 2번은 순서를 바꿨다. 사실 '1990년에는 쌀 기능 식품이 유행했고, 2000년에는 유기농, 2010년 웰빙이 가장 검색량이 많은 키워드로 기록됐습니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예시로써, 곁가지 정보에 불과하다. 그래서 다들 흘려버리게 되니 차라리 순서를 바꾸고, 짧게 끊어주는 것으로 집중하게 만드는 편이 낫다. '변화한다'라는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던지고 보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식품에도 여러 트렌드가 떠오르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순서가 맞지만, 주인공이 너무 늦게 등장한다. 영상에서는 주체가 먼저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활자는 문장이 길어지더라도 다시 돌아가서 주어를 찾고 이해하면 그만이지만, 영상은 그렇지 않다. 귀로 정보를 듣기 때문에 한 번 놓치면 따라 가기 힘들고, 그게 이탈률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 그래서 문장은 최대한 단어를 위주로 이루되,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 만약 저 영상이 쇼츠 혹은 편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면, '식품 트렌드는 매년 조금씩 변화합니다. 소비자의 니즈를 반영하기 때문이죠.'라고 끊어주는 편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