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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Apr 10. 2024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를 간병인에게 맡기고 나왔다.

재활병원에서의 시간은 봄날이었다. 아버지는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회복되고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동안, 아버지는 병원의 현대적인 시설에 감탄했고, 즐거워했다. 나 역시, 부축없이도 몇걸음씩 걸을 수 있는 아버지를 보며 즐거웠다. 회복은 어느정도 당연해보였다. 다만, 그 끝은 걱정스러웠다. 회복기 재활병원은 병원마다 다르지만 알아본 곳은 한달에 이백만원선의 비용을 이야기했다. 그마저도 간병인은 생각지 않는 금액이다. 물론, 더 많은, 천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말하는 곳도 있었고, 찾아보면 꽤 저렴한 곳도 있었을 것이다. 내 선에는 그래도 환경이 좋은, 나쁘지 않은 곳을 선택한다고 이백만원선을 말한 곳 중에 하나를 선택했다. 한달에 이백오십, 당장은 감당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지만, 문제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회복기 재활병원은 최대 6개월까지 입원이 가능하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지원금이 나오지 않는다. 월 이백오십은 국가에서 지원되는 금액을 감안한 비용이다. 이미 두 달 동안 적지 않은 병원비를 썼고, 병원비 말고도 돈이 필요한 곳은 많았다. 아버지의 마이너스 통장은 매 달 이자가 더해져 더 많은 이자가 나가고 있었고, 핸드폰 요금, 전기세, 관리비, 보험료가 나가고 있다. 두려운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완전히 회복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지낼 수 있을까. 만약에, 만약에, 답이 그렇지 않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월 이백오십의 청구서가 언제 끝날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아버지는 보일러를 고쳤다. 도배를 하고, 수도를 고쳤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아버지가 퇴근하고 난 뒤의 추가적인 일이었다. 누나와 내가 서울에 갔을때도 아버지의 일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보일러를 고칠 집에 누나와 나를 데리고 가서 얌전히 앉아있게 하고, 보일러를 고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에게 보일러를 고쳐달라고 했던 그들도, 그렇게 넉넉하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빌라의 어떤 아이의 방에 '얌전히' 앉아, 그 집이 무척이나 좋아보인다고 생각했다. 책상이 있고 책장에 동화책들이 꽃혀있는 방을 보며, 나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얌전히 있는 것은, 가난한 아이의 장점이다. 가난한 아이는 얌전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돈을 빌리러 이집 저집을 다닐때에도,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학원에 가서 할머니가 사정을 할때에도, 처음으로 교복으로 사러 교복집에 갔을때에도, 얌전히 있었다. '애가 참 얌전해요.' '그럼요 얘가 공부도 참 잘한답니다.' 와 같은 소리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난하고 얌전한데다 공부도 잘하는 아이는 좋은 거래 수단이 된다. '얘가 공부를 잘하는데, 학원비를 좀...' '공부도 잘하고... 조금만 더 깍아줘요' 와 같은 부탁을 사람들은 쉽사리 거절하지 못한다. 다만, 교복을 살때는 너무나 끝도 없이 깍아대는 바람에, 옷걸이 하나 받지 못하고 겨우 교복 한 벌만 받아내서 쫒겨나다시피 했다. 나는 내가 어쩌다 그렇게 얌전해졌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는 것은, 나는 원래 전혀 얌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장남감을 가지고 싶다고, 울고 떼를 썼다. 그러니 내가 얌전해진 것은 내 천성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인가가 나에게 배움을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노동은 그 배움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도 누나와 내가 서울에 가는 날은 아버지의 많지 않은 휴가중에 하나였겠으나 그마저도 아버지는 보일러를 고치고, 도배를 하고, 수도를 고쳤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에 붙여놓은 엘레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를 평생 살아보지 못했고, 진미채나 꽃게 무침 같은 것들은 누나와 내가 서울이나 와야 사먹었다. 나중에, 누나와 내가 직장에 다니고, 아버지의 일도 더 나아져서 그렇게 아껴살지 않아도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돈 쓰는 것을 그렇게 걱정했다. 식당에서 요리라도 하나 시키려고 하면, 그럴 것 없다고 펄쩍 뒤던 아버지는, 지금 이 병원비 청구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리고 나는 또 간병비를 생각해야 했다. 누군가는 여기서 어쩌면, 끝까지 아버지를 보살피며 병수발을 드는 이야기를 기대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뇌출혈 환우 모임 카페에서 종종 그런 이야기를 찾아 보면서 용기를 얻었던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보다는 조금 더 평범한 사람이었다. 내가 살던 삶을 한 순간에 내던지는 용기가 나는 부족했다. 어쩌면, 나는 항상 그랬다. 나에게 일부 불행이 있었지만, 그 불행은 어쩌면 흔한 것일지도 모른다. 매일 밤 배가 고파 잠이 들지 못하거나, 잘 곳이 없어서 방황하지 않았다. 삶속에서 나는 나보다 더 흙냄새가 나는 삶의 냄새를 다른 친구들에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평범함을 동경했다. 밥을 굶지는 않았으나, 겨우 단무지 한조각만 들어있는 김밥 도시락을 친구들 앞에서 꺼내어 먹고 싶지 않았고, 나이드신 할머니가 실수로 설탕을 넣어 끓긴 김치찌게를 일주일씩 먹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집 찌게는 다 먹고 새로 끓이는 것이 아니라, 먹고 물넣고 재료 넣고 다시 끓이고, 다시 끓였기 때문에 한번 잘 못 끓인 찌게는 맛이 서서히 변하는 형태로 밥상에 계속 올라왔다) 소금에 기름을 섞은 기름 소금은 별미였으나, 사실은 이것보다는 구운김이나 계란후라이, 케찹 같은 것들이 더 맛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는 것과 자는 것 외에도,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고모들은 얌전한 나와 누나를 칭찬하면서도, 사촌동생들은 하지 않는, 빨래나 설겆이 같은 것들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어린 나는 아픈 할머니의 병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것들을 했을 때 포기해야 하는 것들, 공부를 하고, 책을 보거나, 아니면 사촌동생이 쓰다가 물려준 컴퓨터를 하는 것들을 설겆이 대신에 하고 싶어했다. 내 기준에서 그것은 주변의 평범함과 비교해서 크게 사치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일말의 평범함을 동경하고, 어느정도는 아픈 할머니를 외면하면서 약삭 빠르게 나의 삶을 챙겨넣었다.


그리고 간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사고와 병에 대해서 나는 무한히 나의 삶을 바칠 각오가 되지 않았다. 나는 분가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와, 평생을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아내가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는 약간의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고, 주위 평판도 신경쓰는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대단하게 내세울 것도, 특별한 자랑거리도 아닌 이 삶은, 원래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 평범함은 악착같이 이뤄낸 것은 아니었더도, 다른 이들에게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다소의 비겁함을 더해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난 또, 다소의 비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 평범함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집에서는 평범한 가정의 아빠이자 남편으로, 회사에서는 일개 직원으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올해의 성과급은 어떻게 될지 이야기하고, 새로운 기획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주말에는 가까운 공원에 아이와 함께 산책하며, 연휴에는 나드리라도 갈 계획을 세우는 정도의 삶을 계속 하고 싶었다. 내 기준에서 그것은 주변의 평범함과 비교해서 크게 사치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보일러를 고치고, 도배를 하고, 수도를 고쳤다. 아버지는 그 삶을, 너무 어린 나이에 구렁텅이로 떨어져 앞이 보이지 않는 누나와 나의 평범한 삶을 위해 살았다. 그러니, 아마도 아버지는 같은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재활병원에서 며칠이 안되, 나는 아버지를 간병인에게 맡기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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