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는 아버지가 씻겨주었다
두 번째 병원을 퇴원하기로 했다. 세 번째는 종합병원이 아닌 재활병원이었다. 아버지는 위독한 상태를 넘기고 점차 회복되었다. 발병 60일 즈음에는 부축을 받아 화장실에 갈 수 있었고, 배변에 대한 의사표시를 명확히 해서 기저귀를 찰 필요가 없었고, 가족들을 명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도 오래된 기억일수록 명확했다. 듣는 내용이 맞는지 틀린지 명확하게 의사 표현할 수 있었다. 단어들이 몇 개씩 뒤바뀌어 있어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버지가 말하는 꽤 긴 문장들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뇌출혈로 손상된 언어와 인지, 운동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재활치료가 필요했다. 재활치료를 위한 지원금도 결정에 도움이 됐다. 국가에서 지정된 '재활의료기관'은 발병 60일 이내에 입원하면 최대 180일까지 재활 입원이 가능하고, 일부 금액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창문 없는 병동을 떠나기로 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신이 났다. 퇴원을, 그토록 나를 괴롭히고 고집을 부렸던, 퇴원을 하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병원에 바로 입원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복잡한 상황까지 이해할 만큼의 인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저 이 병원에서, 환자복을 벗고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퇴원. 그것은 굳이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나 역시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사고 이후로 처음 환자복을 벗었다. 집에서 가져온 등산복과 바지로 갈아입으니, 아버지는 정말 꽤 나은 것 같았다.
퇴원하는 날, 내 차를 타고 누나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처음 119에서 전화가 왔을 때, 차를 가져갈지 기차를 타고 갈지 고민했던 것이 생각났다. 오래 걸려도 퇴원할 때 차가 낫겠지 생각했던 것이, 두 달이 걸렸다. 한여름이었고 날씨는 맑았다. 때는 아직 코로나여서 퇴원하는 병원에서 PCR검사를 받으면 지체 없이 다음 병원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날씨가 너무 좋았다. 두 달여 만에 처음으로 환자복을 벗고 병원밥이 아닌 식사를 할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병원 앞 한식집에서 굴비를 먹었다. 아버지는 “야, 반찬이 많다.”라고 했고, 누나는 이 병원에서 재활을 열심히 잘해서, 얼른 낫자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만 될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꿈처럼 아름다운 날이었다.
짧은 외출을 마치고 곧 새로운 병원에 입원했다. 새로운 환자복을 입고, 새로운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변화한 환경은 활기찼다. 나는 틈만 나면 아버지를 걷게 하기 위해 병실 밖으로 나가보자고 했고, 아버지는 환히 웃으며 나를 따랐다. 아버지는 완전한 병식은 없었으나, 어딘가 아프다는 것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병원은 무언가 그 답을 줄 것만 같은 곳이었다. 병원 1층을 통째로 쓰는 재활치료실에 처음 들어가는 순간, 수많은 환자들과 치료사들이 모여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에 아버지는 큰 인상을 받은 듯했다. 나는 이곳이 얼마나 전문적인지, 얼마나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인지를 거듭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씻겨드렸다. 두 달 만이었다. 그전에는 수많은 주삿바늘이 꼽혀 있어서, 아버지의 거동이 어려워서, 제대로 된 목욕실이 없어서 미뤘던 목욕을, 그제야 했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목욕을 한 것이 언제였을까. 어린 나는 자주 씻지 않았다. 벌레가 득실거리는 부엌을 지나서 가장 구석에 위치해있는 습하기 이를 데 없는 욕실은, 씻기는커녕 가까이 가기도 싫은 곳이었다. 욕실을 깨끗이 관리하기에 할머니는 너무 아프셨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씻기었다.
누나와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뒤로 아버지는 한달에 한번쯤 내려와 이틀씩을 자고 갔다. 방학에는 아버지가 사는 서울로 누나와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의 집은 매번 다른 곳이었고, 반지하에 있거나, 수많은 계단으로 이어진 높은 마을에 있거나, 빌라의 숨겨진 쪽문으로 이어진 별채에 있었다. 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집이 아닌 바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서울이 얼마나 크고 좋은지를,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곳에 살고 있는지를 자랑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할머니집에서는 먹기 어려운 진미채나 오뎅국 같은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전에 누나와 나를 씻겨 주었다. 수돗가에서 대야에 물을 받고, 누나와 나를 차례로 무릎에 받쳐 머리를 감기고 씻겨 주었다. 어린 나는 밥을 먹고 자기 전에 씻는 것이 몹시 세련되고 현대적인 생활인 것처럼 느껴졌다. 누나와 나를 붙잡아 씻기는 다른 사람은 없었기에.
어린 나는 그것이 나의 삶보다는 세련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의 집이 그 좋다는 서울의 어디와도 닮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저녁반찬으로 먹는 진미채와 오뎅국은 정말 특별한 음식이었으나, 그것은 아버지에게도 특별한 반찬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아버지와 집 앞 반찬가게에 갔을 때, 반찬가게 주인은 묻지도 않고 콩자반을 담아주었다. 그 무심한 반복 앞에 아버지는 화를 내었다. 곁에 나를 두고 아버지는 자신이 콩자반만 먹는 것은 아니라며 화를 내었다. 그렇게 나는 진미채와 꽃게무침과 같은 것들을 골랐다. 나는 아버지가 매일 같이 콩자반만 먹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를 씻겨드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갔던 시간을 생각했다. 하루 종일 어린 아들, 딸을 데리고 다니며 서울 구경을 시키고, 저녁밥을 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남은 시간들을 매일같이 콩자반을 먹으며 홀로 저녁을 보내는 삶을 생각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아버지에게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나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 아버지에게도 어려운 시간이었음을 알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말하지는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이 세상에 나와 누나와 아버지만이 알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90년대의 추억과는 조금은 다른 기억들. 특별한 것 없지만, 회사의 다른 사람과 점심을 먹고 웃으며 말하는 어린 시절에 끼어들지 않는 이야기.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없고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 줄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이 세상에는 그런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는 더는 아는 사람이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