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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Mar 29. 2024

아버지가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외롭게 만든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픈 지 한 달이 지났다.


아버지가 아프고, 꽤 오랜만에 엄마의 필요성을 생각했다. 오랜만이라는 것은, 삼십 년은 되었을까.


항상 나이에 맞지 않는 책임이 들이닥치는 것에 익숙했다. 그렇다고 내가 소년가장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었고, 다만 주변의 친구들이나 사촌동생들, 직장동료들이 겪지는 않을 만한 일들을 조금씩 더 겪는 것이다. 그 정도 책임으로는 엄마의 필요성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면 생각하지 않게 훈련되었거나.


병원은, 말한 대로, 간병인들의 공간이었다. 대부분은 다 간병인들의 일이었고, 간혹 가족 보호자가 있었다. 가족 보호자들은 나와 같은 젊은 남자는 잘 없고, 젊은 여자도 잘 없고, 보통은 나이가 좀 있는 어머니 연배의 여자분들이 많았다. 그러니 알았다. 부부가 아프면, 먼저 부부가 간병인이 되고, 그리고 그 부부 중에 하나가 죽으면, 그다음은 자녀로 순서가 넘어갔다. 나에게는 조금 더 순서가 먼저 왔다.


간병에서 무엇이 제일 어려운지를 하나 고르라면, 그것은 선택이다. 잠 못 드는 밤도, 좁은 침대도, 섬망도 아닌, 선택의 어려움이다. 아버지는 부쩍 회복되어서 소변줄을 빼고, 침상에 앉아서 소변통으로 소변을 볼 수 있게 됐다. 부축을 받아 몇 발짝을 움직어 휠체어에 탈 수 있었고, 거칠지만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병식이 없었고, 종종 섬망이 있었으며, 언어는 전혀 회복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때로는 알 수 없는 고집을 부렸고, 함께 있는 사람을 지치게 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고집은 힘들고 어려웠다. 몸은 회복되어 갔지만, 인식은 더디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렇게 간병이 한 달이 넘어가는 사이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환자가 아니었던 아버지의 일들은 나에게 던져졌다. 대출에 대한 만기 연장 신청을 하고, 나는 모르는 '아랫집' 사람으로부터 누수에 대한 수리 요청에 응하고, 아버지가 농사짓는 옆의 땅 주인에게 무슨 동의서를 쓰고, 노후경유차량에 대한 사용 연장 신청을 내고, 면세유에 대한 등록을 하고, 농작물에 대한 출하계획을 보고하고, 경찰서에서 자전거 사고에 대한 조사를 받고, 미납된 관리비와 알 수 없는 전기세를 납부하고, 또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하고...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이들로부터 들어오는 요청에 대해 응답하고, 처리하고, 해결하며, 돈을 쓰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매번 그때마다, "대체 이건 또 뭐예요?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라고 아버지께 묻고 싶었다. 65세가 되어 은퇴한 아버지는 여전히도 많은 것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는 반쯤은 넋이 나간채로 무지성으로 닥치는 일들을 처리했다. 하나하나를 따져서 처리하기에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아버지는 곁에서 알 수 없는 말들로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많은 선택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들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고 두 달째에 나는 세 번째 병원을 찾고 있었다. 청주의 병원에서 수도권의 병원으로 오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서울로 위치를 옮기는 것도, 그 안에서도 어떤 병원을 찾아가야 할 지를 결정하는 것, 모두가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당연한 선택이지만, 당시만 해도 여전히 아버지가 몇 주안에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같은 증상에 대해서도 병원에서는 서로 다른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사고가 나면서 광대뼈가 살짝 부러져 함몰됐는데, 한 곳에서는 그냥 두라고 했고, 다른 곳에서는 수술을 하라고 했다. 뇌출혈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어떤 말이 맞는 걸까. 또, 한 곳에서는 뇌출혈의 양상이 특이하다고 했다. 출혈이 다발적이고 MRI 상으로 뭔가 의심되는 부분도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고 나기 전,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 혹시 사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출혈이 있는 건 아닌지 까지 의심했다. 출혈이 좀 나아지면 조직검사를 하는 것이 어떤지 제안하였으나, 그렇게 큰 병원도 아닌 곳에서 검사를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안 그래도 더 큰 병원, 더 전문화된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계속 생각하는 중에, 사고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진단은 신뢰를 더 떨어뜨렸다. 그 밖에도 수많은 고민이 이어졌다. 회복이 더딘 아버지를 위한 집중적인 재활 치료가 필요할까? 뇌출혈 전문 명의가 있다는 어디 어디 병원으로 갈 방법은 없을까? 입원이 어렵다면 외래진료로라도 찾아가 봐야 할까. 그런 고민들을 하며, '아버지, 대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라는 말이 수없이 삭여졌다. 아버지가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점점 더 지쳐가는 나의 선택들이 혹시나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영영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나랑 누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언제까지 직접 간병을 할 수 있을까. 간병인을 쓴다면 어디서 사람을 구해야 할까. 어떤 사람을 써야, 믿을 수 있을까. 점점 더 숫자 감각이 없어지게 만드는 병원비에 더해서 간병비는 또 얼마나 나올까. 이런 끝없는 고민들 끝에 내린 선택이 아버지가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봐 걱정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가 아닌 나를 위한 선택을 하게 할 사람은 아버지 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라고 말할 사람은,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마음의 짐을 훌훌 털고, 다시 좀 쉴수 있게 만들 사람은 아버지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럴만한 사람은 없었고, 아버지가 하는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잠깐 생각했다. 아버지의 평소의 상태, 아버지가 처리하던 여러 일들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고, 그리고 누나와 나에게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지 말해주고, 또 그 선택에 대해서도 후회가 없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는 외로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외로움에 대해서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원망이라는 것을 하기에 그녀는 나에게 완전히 부재한 존재였다. 오직 아버지만이 실재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아버지에게 돌렸다.


나는 아버지의 외로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도 그런대로 훌륭하게 자라난 아들이었고, 그것은 아버지도 어머니의 자랑도 아닌, 나의 자랑, 아니면 나를 키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랑이었다. 나의 일곱 살 생일 이후로, 생일에 작은 선물 하나 없더라도, 뭐 하나 달라고 한 적 없었던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조금 더 나에게 잘해주었어야 하는, 다소의 빚을 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는 아버지의 외로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고 나서, 한번 더 어머니가 부재한 나를 만든 아버지를 원망한 뒤에야, 아주 잠깐, 혹시 아버지가 외롭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나에게 '지금 난 좀 힘든데요. 그냥 어떻게 할지라도 좀 알려주면 안 될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버지에게도 그런 사람이 없었을까, 라고 생각했다. 내가 일곱 살이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있었을 때, 아버지는 그 때 몇 살이었는지를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을지를 생각해 봤다. 그 때는 한여름이었고, 아버지는 나보다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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