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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Mar 24. 2024

코로나 병동

대한민국의 수용시설로는 가장 높은 밀도

코로나 시대의 병동은 시장을 연상하게 했다. 그것도 번듯한 점포가 있는 것이 아닌, 메인 골목 뒤편에 자리를 깔고 여기저기 행상을 깔아놓은 시장의 분위기가 났다. 누군가는 코로나와 병원, 그리고 시장이라는 연결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코로나와 병원이라고 하면 엄중하게 격리된 격리실과 드리워진 죽음의 냄새, 격무로 지친 간호사와 의사들, 이런 것들이 더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모습일테니. 그러나 코로나의 시대의 한 복판에서 병원'생활'을 해야 했던 내게 그곳은 북적이는 시장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코로나 기간 중에, 입원병동은 누군가의 방문도, 외출도 허가되지 않는 격리된 구역이었다. 보호자는 단 한 명의 상주만이 허용되었고, 상주하는 보호자는 교대도, 외출도 허가되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에 입원은 극도로 꺼려졌고, 병실은 쉽게 퇴원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코로나 시대에서 쉽게 퇴원할 수 없는 환자들. 그들은 보통은 누워서 움직일 수 없는, 이른바 와병 환자들이고, 그들의 병원 생활은 결코 짧지 않았으며, 그 환자를 간병하는 보호자는 이미 지쳐 자연스럽게 가족이 아닌 다른 간병인들로 대체되었다. 거기에 몇 달이 넘게 길어지는 격리 기간 동안 간병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고용인인 보호자의 눈치를 볼 일이 없는 병실의 주인이 되게 되었다.


그 병실은 10평이 채 되지 않는 공간에 환자를 포함해 열두명이 바깥출입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노상 누워있는 환자의 침대를 제외하면 접었다 펴서 침대로 사용하는 의자 한 개, 문 하나짜리 캐비닛 한 개, 그리고 아마도 더 작은 사이즈는 없을 법한 미니 냉장고 하나가 한 사람 앞에 주어진 공간이다. 그 공간으로 몇 날이고 바깥출입은 일절 없는 생활을 해야 하니, 대한민국의 수용시설로는 이 이상으로 좁은 수용시설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세간살이는 개인의 공간을 넘어서게 되고, 밖으로 드나듦이 없으니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의지하게 되어, 병실은 마치 행상들이 열 지어 늘어선 시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 역시 병실의 6명의 환자와 6명의 보호자 중에 한 명으로써 그 한복판에 있었다. 한복판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이 아버지의 자리는 안타깝게도 창가자리도 아니고, 벽을 면한 자리도 아닌, 양옆에 병상을 두고 사이에 끼인 자리였다. 양옆에 병상을 두고 사이에 끼인 자리는 여려모로 불편한데, 일체의 자투리 공간이 존재하지 않아 조금 더 공간이 좁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누워있는 간이 의자에서 어느 면으로도 기댈만한 벽이 없이 큰 일이었다. 침상 난간이 있는 환자 침대와는 달리, 보호자가 눕는 간이 의자는 어디에도 의탁할 벽이 없다. 그나마 양쪽 끝 자리는 벽에 면해 있으니 자면서 벽에 기댈 수도 있는데, 그저 내 옆으로는 커튼뿐이라 조금만 뒤척거리려 해도, 옆 환자 침상 밑으로 나뒹굴기 예사였다. 그나마도 간이 의자는 다 펼쳐도 내 키만큼이 되지 않아, 누우면 항상 발이 밖으로 동동 떠있게 되는 것은, 보기에 좀 그래서 그렇지 그다지 불편한 축에 속하진 않았다.


좁다는 사실에 더해 가장 어려운 것은, 말한 것과 같이 인지가 저하된 아버지가 끊임없이 움직이려고 하였기에, 나는 단 십 분도 병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때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창문이었다. 병실에 창문은 있지만, 모두가 커튼을 치고 있기 때문에 창가자리가 아닌 이상에야 창밖은 보기 힘들었다. 병실은 항상 어둡고 질병과 고통과 약물의 냄새, 제대로 치워지지 못한 배설물의 악취가 끈적하게 배어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활기찬 창밖의 풍경이 그리웠다. 어쩌다 창밖을 바라볼 기회가 생기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일상은 그저 행복하게만 보였다. 밖의 삶,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원하면 창밖도 바라볼 수 있고, 매 끼니마다 먹을 것을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삶, 나는 다만 그런 삶의 빛과 향기가 들이치는 창가가 몹시도 그리웠다.


그러나 이곳에서 대신 하루종일 마주해야 하는 것은 모조리 기묘한 희극들이었다. 내 자리를 기준으로 대각선 맞은편으로는 이곳에 아주 오랫동안 와병환자로 누워있는 듯한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의 간병인은 수시로 환자에게 욕설과 구박을 했다.

"에이 씨발, 이 할아버지가 또 오줌을 쌌어. 오줌을 싸면 말을 하란 말이야. 오줌이 다 샜지 않갔어?"

환자는 그런 구박으로 받으면 "으으으, 으으으으으" 같은 신음소리만 내며, 속수무책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매번 그렇게 신음소리만 겨우 내는 듯한 그를 나는 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녀로 생각되는 분과 영상통화를 하는 소리를 듣고, 그가 많이 어눌하긴 하지만 여전히 충분히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여기 잘 지내. 뭐 필요한 거 없어. 나는 잘 지내."

매일 같이 간병인과 실랑이를 하며, 주변 간병인들에게 웃음거리나 되는 신세인 그가, 말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가, 또박또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어, 아빠, 내가 거기 갈 수가 없어서 그래. 내가 여기에 기도할게."

며칠 만에 들어본 자녀의 통화는 길지 않았고, 기도하겠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기도. 이곳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였다. 그는 잘 지내지 못했고, 그날도 욕설과 모욕을 피할 수 없었고, 어쩌면 여기서 죽음으로 나가기 전까지 피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가 지금은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살고 있을까? 그때, 그 병실의 6명의 환자 중, 다시 따사로운 햇살과 공기가 있는 '밖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몇이었을까. 하루종일 침침한 병실 안에서, "으으 으으으으"하는 신음소리를 듣지 않고, 내지도 않고, 소변이 보고 싶으면 화장실에 가서 깨끗이 손을 씻고, 매일 밤 간이침대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고, 찾아지지 않는 혈관을 찾아 이미 너덜너덜한 손등에 새 주삿바늘을 꼽지도 않고, 섬망에 시달리는 옆 환자의 고함소리에 새벽에 깨지 않고, 이제는 다들 평안한 잠을 자고 있을까. 이제는 부디, 그들 모두가,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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