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쳤다고요? 축하합니다!
사회생활을 10년쯤 하니 번아웃이 왔습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사실 직장인이라면 모두들 얼마쯤의 번아웃은 늘 달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흔해빠진 이야기입니다.
번아웃이란 귓가에 작은 벌레가 매일, 매 순간 ‘지친다’, ‘지겹다’는 말을 끊임없이 속삭이는 일 같았습니다. ‘소진되었다’ 이런 느낌이었죠. 자신이 소진된다는 것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그런 일들은 필연적으로 청량감과 고양감을 동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진된 느낌은 무겁고 막힌 감각입니다. 무감각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일어날 힘도 없는 것 같은, 막연한 기분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진된 느낌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만약 소진된 감각 없이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축복받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범인 중의 범인, 평범 중에서도 지극히 평범했던 저는 그야말로 배터리가 방전되어 버렸습니다.
소진되어 지쳐버린 마음에도 마른땅 위로 솟아오르는 위태로운 새싹처럼 연약하지만 강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번아웃은 다른 시작을 위한 신호’라는 것이었습니다. 직관이라는 지성이 몸을 연결기관 삼아 오장육부 저 깊은 곳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신호 같은 느낌이었어요. 감각적으로 머리가 아니라 뱃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영감 같았습니다. 영혼이 잡아당기는 목소리 같았달까요.
번아웃을 거창하게 표현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닙니다. 내 안에 무엇인가가 잔뜩 끼어서 피아를 구별 못하고 진득하게 엉켜 붙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되돌아봐 달라고, 모른 척하지 말라고 영혼이 잡아당기는 기분이었습니다.
‘잘못 살아온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회와 회한의 말은 아닙니다. 그 당시 저는 비록 지쳤지만 나름 노력하고 성실히 살아왔다는 자부심, 애를 쓰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뿌듯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못 살아온 것 같다는 말은 직관 같은 떠오름이었습니다. 방식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그때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던 일을 멈추고, 정확히는 목적도 없이 앞으로만 치닫던 욕망, 감정, 생각을 멈추고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자신과 친해지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 한 귀퉁이에서 잠깐 읽었던 그 화두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지치는가?’, ‘왜 이렇게 소진하며 살았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지?’ 같은 질문들을 통해 지금까지 나 자신보다는 외부의 무엇인가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럴듯한 직장과 우상향 하는 연봉과 커리어, 사회적 지위 이런 것들이 삶을 좌우했고, 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갈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로요.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 참 평이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인생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왓(what) 보다는 하우(how)가 중요한 법이라는 것을요. 결과만 따지자면 인생은 단편적인 것이 됩니다. 결과를 얻는 순간은 짧고 ‘성공’과 ‘실패’ 딱 두 가지만 남습니다. 하지만 과정은 연속적이고 매일매일 우리가 마주하는 실제적 현실입니다. 인간은 매 순간 숨을 쉬고 다양한 것을 느끼고 살아가는 존재이니까요. 인생이 생동하는 것은 과정이 살아날 때입니다.
이 질문 하나를 바꾸고 (체감상으로는) 그간 수백만 번의 생각의 전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일상에서 아주 작은 알아차림과 깨달음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몸을 돌보고 나의 마음을 돌보고, 일상을 돌보고,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일은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번아웃이 온 뒤로 5년 사이 많이 변했다면 변했고 변하지 않았다면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머리와 가슴은 더 가까워지고 가슴 뛰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매일 더 느끼고 있음을.
이 글을 쓰는 현재에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로요.) 막 퇴사한 백수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의 존재의 상태는, 즉 마음의 상태는 상당히 다릅니다. 더 희망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실대고, 고무적입니다. 알 수 없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기고 있습니다.
나 자신으로 아주 가깝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일입니다. 아주 자유로운 기분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번아웃부터입니다. 어딘가 아프다는 것은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무엇인가 잘못 살고 있다는 소중한 신호입니다. 그럴 때 이 신호를‘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상당한 수준의, 그것도 천지개벽할 정도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삶의 모든 결과들을 좌우하게 될 정도로요.
이렇게 생각하니 번아웃도 별거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