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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정윤 Oct 07. 2024

누구 씨, 집 좀 살아요?라는 말에 담긴 의미

저는 생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후배가 앞으로의 계획도 없이 퇴사를 하겠다고 하니 면담을 하던 윗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왔습니다.


“누구 씨, 집 좀 살아요?”


아마도 딴에는 젊은이가 계획도 없이 함부로 직장을 관두는 것에 우려를 표현한 말일 겁니다. 나쁘게 보자면 오지랖일 수도 있고 좋게 보자면 배려일 테고, 그 이면에는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생존하기에 얼마나 차가운 세상인지 두려움을 자극해 한번 잡아보려는 전략도 포함되었을 테지요.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후배는 상당히 기분이 상했고 상사에 대한 욕을 한 바가지 했더랬습니다. 저는 후배의 마음도 그분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자면 후배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집 좀 살아요?’ 하는 물음 뒤에는 숨겨진 뜻이 있기 때문이죠. 첫 번째로 집이 잘 사냐는 말은 곧 집에 돈 좀 있어서 생계에 대해 걱정 않고 살 정도가 되느냐? 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일을 안 하고도, 즉 월급이 없어도 마음 편하게 살 정도로 돈이 없다면 곧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도 숨겨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냉정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흙수저라면 흙수저답게 현실적으로 살아야지. 치기 어린 용기는 필요 없다.’는 차가운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확대 해석한 걸까요?


하지만 저는 이런 뜻이 숨겨져 있지 않다면 그 후배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돈’으로 명확히 한계를 짓는 그 말에 그 후배는 상심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저도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생존한다’는 것은 인생의 참 중요한 과제입니다.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 때에 드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죽음이 삶에 늘 가까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질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 죽는 느낌, 생존과 반대되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자꾸 돈에 얽매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돈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돈 버는 일 이상의 더 엄청난 가치가 세상에 있으니 돈은 별 것 아니라는 말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만해도 무엇을 하든 돈을 잘 벌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들인 노력의 정당한 보상 방법 중 하나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그것은 돈이 주인이 되는 인생입니다. 문제는 그 때문에 오는 마음의 장벽입니다.


‘돈이 없다.’

‘살아갈 방도가 없다.’

‘사회에 내 자리가 없다.’


이런 생각들은 불안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불안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계를 만듭니다. 저만해도 그랬습니다. 당장 돈을 버는 것이 중요했지 어떤 삶과 일을 원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월급을 받으며 1인분의 몫을 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돈에 대한 강박은 억제와 인내에 대한 강박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가는지, 일을 더 재미있게 하는 방법은 있는지 좀 더 창의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장 상사가 시킨 일을 마음에 쏙 들게, 센스 있게 딱딱 해내서 오늘도 내가 월급 받는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반항심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정말 이뿐인가? 이렇게 살기만 하면 나는 되었나?’


안정된 직장에서 월급은 따스웠습니다. (따뜻하다는 말로 잘 표현이 안됩니다. 어감을 살려 말해야 합니다. 정말 따습습니다.) 다음 달에도 같은 금액 정도의 월급이 들어오고 1년 뒤에는 조금 더 높을지도 모르는 예측 가능한 보상은 마음의 편안함을 주었습니다.


모순되게도 그와 동시에 마음에는 점점 더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인생으로 전환을 하고 싶었습니다.


연차가 쌓이면서 많은 권한이 늘어났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물론 경직된 조직문화 탓도 있었습니다.) 모든 비전, 향후의 커리어의 방향, 일의 방향도 윗사람이 제시해 주더군요. 예전이라면 좋아했을 리더의 모습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아니었습니다. 윗사람이 정해주는 회사의 방향에 맞게 저의 방향도 정해져 있었고 따라야 했습니다. 따르지 않을 시에는 조직의 문화를 해치고 주위 조직원들에게 악영향을 줘 하루빨리 나가야만 하는 소위 말하는 썩은 사과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즈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생존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만을 추구할 때 괴로웠습니다. 수동적이 되어야 했고 맞춰줘야 했으며 참고 인내해야 했습니다. 적당히 마음 한 구석을 잘라내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제부터 직장인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나?’, ‘원래 그런 것이다’는 자조적 위로를 하며 살았습니다.


때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율적인 즐거움과의 균형이 맞지 않을 시에는 지속가능한 삶으로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참는 게 병이 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옛 성현들이 중용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나는 생존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자율적으로 살아가며 기쁨과 행복을 기반으로 선택하고 살아간다.’

‘나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이룰 충분한 힘을 이미 갖추고 있다.’

‘나의 삶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그 일을 기반으로 사람을 만나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워커홀릭(worker holic)이 아니라 워커스하이(worker’s high)가 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일을 강박과 중독을 기반으로 한 보상체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에서 오는 내적인 창조적 기쁨을 바탕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다시 돌아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물어야 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동시에 무엇을 잘하는 지도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면 그렇게 살아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타율과 자율’


배수의 진처럼 그렇게 살아보지 않으면, 해보지 않으면 어차피 돌아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타율을 따르는 삶. 원하는 삶을 위해 때로는 ‘돈’, 즉 '생존의 두려움'을 뛰어넘는 결정을 하는 순간도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백수입니다. (헤헷) 그리고 같은 돈을 벌더라도 자율적인 삶이 만드는 돈을 벌어보고 살아가겠다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실패할 확률도 있습니다. 하지만 패잔병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돌아가더라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니까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될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확률은 50대 50입니다!






덧) 워커스하이를 설명한 유튜브 영상을 참고 삼아 붙였습니다.  <장동선의 궁금한 뇌> 채널에 있는 '뇌과학자가 말하는 성공하는 사람 뇌의 특징'입니다. (https://youtu.be/U_bmQ5E4wJg?si=iZy7TQ-jXrsg4i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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