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심심해서 스웨덴에 다녀왔습니다.

난생처음 하는 크루즈 여행

by 콩작가

오늘은 기분이 참 좋았다. 날이 화창했고 거리는 필름을 갈아 끼운 것처럼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집 창으로도 햇살이 밝게 들어왔다.


그래서 이런 날에 특별한 일을 했다. 난생처음 크루즈 여행으로 스톡홀름에 다녀오는 것. 사실 맑은 김에 스웨덴에 다녀온 것은 아니고 스웨덴에 가려고 했는데 날이 맑았던 것이지만.


파아란 하늘과 밝은 햇살이 비춘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 몰랐다. 왜 유럽 사람들이 해만 뜨면 모두 벗고 잔디밭에 나가 있는지 머리로만 이해했던 일들을 몸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냥 햇살이 반갑고 좋은 것이다.


햇살과 파란 하늘이란 이유 없이 콧노래가 나오고 가슴이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 날에 스웨덴 여행을 가니 새삼 또 여행을 왔다는 것을 만끽하게 됐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짐을 싸서 나오는 길 내내 보름간 봤던 풍경이 또다시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올림피아 항구에서 거대한 크루즈를 보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떠난다. 매번 떠나는 여행이지만 어쩔 수 없이 또 설렌다.


타이타닉 호만 하지는 않지만 층층이 아파트처럼 쌓아 올려진 객실과 쇼핑센터들 면세점, 공연장까지 크고 화려했다. 이 나이에도 남아 있었는지 모를 호기심으로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녔다. 5유로로 카지노에서 슬롯머신을 돌려보기도 하고 갑판에 올라가 떠나는 헬싱키의 야경을 쳐다보기도 하면서.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좋았지만 단 한 가지 힘든 것이 있었다. 어지럽다. 큰 배라 흔들림은 없지만 그래도 육지 같지는 않았다.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느낌이 있어서 다시 객실에 와서 침대에 누웠다. 침대 옆에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창문이 놓여 있었고 어느덧 해가 져서 새까만 바다와 하늘만이 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배가 지날 때마다 물거품이 일어난다. 그리고 작은 유리창 사이로 이제 마흔둘을 넘기고 있는 내 얼굴이 자화상처럼 비춘다.


새삼 내 인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별로 이룬 것도 없고 중년의 나이에도 삶은 여전히 불안정한 나의 삶. 켜켜이 쌓여있는 문제들도 생각난다. 엄마가 올 해는 건강할지 지난 몇 년간 사건 사고가 많았던 친오빠의 삶도 생각한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걱정 사이로 또 다른 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그런다 한들 어떠하리.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어도 이렇게 충분히 경험하고 사는 삶이 있는데.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아가고 정리할 것이며 친오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조카들도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헤쳐갈 것이다. 내가 그들의 삶을 책임져줄 수는 없지만 내 삶은 다르지 아니한가.


요 며칠 악몽을 꿨다. 나라 상황이 불안한 것도 한 몫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내년 경제는 어떻게 되는지 나는 먹고살 수나 있는 것인지, 환율이 이렇게 뛰어오르는데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가족들도 걱정되고 내 인생도 걱정되는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고 또 경험하고 걱정과 불안은 놓아버리고 삶을 버리지 않고 진실되게 그렇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내가 어찌 알 것인가. 모든 것은 삶이 펼쳐주는 대로, 우주가 펼쳐주는 대로 내맡기고 따르는 수밖에.


그리고 고맙지 아니한가. 마음속에 들끓던 불안과 걱정을 뒤로하고 이 먼 곳까지 와 생전 처음 크루즈를 타보고 스웨덴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이 기적 같은 오늘이. 이걸로 된 것이다.


까만 창을 바라보며 씩 웃어본다. 왼쪽 관자놀이에 하나둘씩 늘어가는 흰머리를 가진,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리석기만 한 한 사람이 미소 짓는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이 형편없다 해도 다시 일어나는 수밖에. 올해 갔던 히말라야가 알려줬고, 15년 직장 생활이 알려줬고, 치기 어렸던 미국 생활이 알려줬고, 40년 내 인생이 말해줬잖아. 그렇게 다시 살아가는 것이라고. 과거가 후회스럽고 미래가 안 보인다 해도 오늘은 이렇게 기분 좋은 햇살이 비추고 나는 그 햇살 아래를 걷고 있으니 그것이면 됐다. 어지러울 때는 지금을 보고 또다시 걷는 수밖에.


그리고.. 이만하면 좋은 삶이다. 북유럽 발트해 위에서 촘촘히 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는 삶이니.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과 햇살. 이 두 가지만으로도 선물 같은 하루.
스웨덴으로 떠나는 실자라인 크루즈.
드디어 탄다! 매번 해도 여행은 설레는 것.
들어왔더니 크고 화려했던 내부. 면세점도 있다.
2박 3일 간 묵을 선실. 생각보다 아늑했다. 바다가 보이는 창문.
갑판에는 사우나가 있다. 왼쪽은 사우나. (수영복 필수)
가판 한 구석에는 강아지 화장실이 있었다. 이런 디테일이 귀엽다.
맑은 날의 헬싱키 야경. 너 참... 낯설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그날의 크루즈 여행.
방에서 바라본 발트해에 떠 있는 별들. 기분이 오묘하다. 발트해의 별을 볼 수 있는 삶이라니 감사하기만 하다.


keyword
이전 06화핀란드.. 심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