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지 않는 삶은 서러움을 만들어 내는 것

아픈 엄마에게서 울린 한 통의 전화

by 콩작가

지난 11월 히말라야를 걷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엄마가 넘어지셨고 당뇨 때문에 위독하다는 문자였다. 네팔에서 바로 돌아갈 수 없던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심란한 마음을 안고서 마무리 지었다.


벌써 세 달 전의 일인데 아직도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다. 다행히 모든 고비를 넘겼지만 오랜 지병이었던 당뇨로 다리가 낫지 않는다. 벌써 병원을 몇 번을 옮겼고 높아져가는 치료비와 휠체어가 아니면 거동이 힘든 지금의 상황 탓으로 장애등급을 받으셨다.


모든 삶의 고비마다 엄마는 언제나 씩씩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슬퍼했고 허전해했지만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 빚이 있을 때에도, 고된 시집살이를 할 때에도, 아빠가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을 때에도 엄마는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고 모든 상황을 유머로 소화했다.


그런 엄마가 장애 등급을 받자 우울하다는 말을 했다. (추후에 이것은 장애 등급이 아닌 요양 등급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애와 요양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심리적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다냐.”


말끝에서 느껴지는 황망함에 가슴이 아팠다.


“엄마 괜찮아. 장애등급이 엄마가 이제 걷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엄마 상처 낫고 재활하면 조금씩 걷는 연습 하면 되지.”


애써 하는 위로였지만 진심이었다.


“그냥.. 눈물이 나온다. 다들 퇴원하는데 나는 이거시 뭔 짓인가 싶고.. 다들 재미있게 산디 나만 여서 뭐 하나 싶고..”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냥.. 살아온 날들이… 그렇다… 죽도록 고생하다가 늙어서는 아프고..”


엄마도 나도 엄마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의 인생길은 고되었다. 엄마는 결혼 첫날 재수 없게 이가 빠진 밥그릇이 자기 앞에 딱 놓일 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고 농담처럼 말하고는 했다.


까탈스러운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고부 갈등이 심했고 두 시부모가 모두 돌아가실 때 즈음에는 아빠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삶의 무게가 두 분의 병을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마흔이 넘어가자 두 분 모두 고도 당뇨가 찾아왔고 아빠는 간경화가 진행됐다. 고된 시집살이는 사라졌지만 10년간 이어지는 남편의 병시중이 시작되었다.


퇴직한 아픈 남편을 보살피면서 자식 둘을 대학에 보냈다. 오빠는 평소에 이런 말을 한다. 집안에 돈 한 푼 없을 것 같을 때 항상 엄마가 모은 돈이 있었다고. 집에 내려가면 방 안이 얼음장같이 차가웠었다. 제발 보일러 좀 켜시라고 해도 듣지를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드디어 엄마에게도 (뒷바라지 없는) 평온한 삶이 시작되나 했는데 그때부터 엄마의 몸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매년 엄마의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한평생 자신의 몸은 보살피지 않고 살아왔던 탓인지 병원을 잘 가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100만 원 남짓 나오는 공무원 연금을 모아 우리를 위해 썼다.


이제야 다리가 부러지고 잘 걷지 못하는 세월이 오니 엄마는 서러운 것이다.


“엄마 내가 이십 대 후반에 얼굴에 여드름이 진짜 많이 났잖아. 기억나?”


“그래. 가장 예쁘고 빛나는 시기에..”


“내가 그때 월급을 160만 원 정도 받았나 그랬단 말이야. 피부과에 몇십을 쓰기가 싫은 거야. 지금은 그런데 쓸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피부과 가서 치료 한번 받지 않고 보냈잖아. 삼십 대가 되어서 얼굴을 보니까 곰보가 되어 있더라고. 여드름 자국이 다 파여서. 그때 그게 그렇게 서럽더라. 그 몇 십이 뭐라고 안 쓰고 살았는지. 그 돈 나를 위해 썼어도 나는 충분히 살았었는데. 그 마음이 나중에 서럽게 만들더라.


엄마… 진짜 다 나아서 병원을 나가면 엄마도 엄마를 위해 돈을 써.. 새로운 인생 산다 생각하고. 병원비 몇 십이 무서워서 가지도 못하고 살지 말고. 그런 마음이 인생을 정말로 서럽게 만드는 거 같아.”


“나는 꼭 이 집에서 내가 아니면 누가 모으냐 이런 생각이 꼭 든다? 나 아니면 누가 돈을 모아서 내 자식새끼들한테 준다냐 이런 생각이 든다니까.”


“알지.. 알아.. 엄마 내가 미국 갔을 때 있잖아. 내 마음이 항상 그러더라고. 아끼고 아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다 참고 제일 싼 차, 제일 싼 집에 살면서 회사에는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비자가 나온다는 생각에 궂은일 다 하고.. 그런데 3년이 지나니까 내 인생이 더 바닥에 있더라. 이웃이며 만나는 사람이 다 달라져 있고 회사에는 정말 아무 일이나 시키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


결국은 못 버티고 회사를 관두고 차를 타고 가는데 서럽더라. 내가 열심히 하려고 했던 일들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엄마.. 나는 사십이 넘어서야 알았어. 내가 나를 위해 얼마간은 돈도 쓰고 시간도 쓰고 해야 한다고. 내가 나를 최소한의 배려도 안 하면 결국 남는 건 서러움이라고. 엄마가 책임감도 강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기 싫고 특히 자식들한테 손 벌리기도 싫고 그런 마음에 그랬다는 걸 알아. 그래도.. 그냥 엄마를 위해 써버리지 그랬어. 그게 더 나았는지도 몰라. 우리는 엄마가 이렇게 아픈지도 잘 몰랐어.


근데 병이라는 게 그렇다? 나 아픈 거 사실 남들은 몰라. 참고 참아서 결국 알아주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 누가 알아줘.”


“맞다, 맞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 진짜야.”


우리는 서로 각자를 위해, 스스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를 하고 살자고 서로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엄마의 희생 위에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고 그래도 괜찮은 회사를 다니며 지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런 희생 위에서 더 참고 참아 더 많이 벌어 엄마에게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자신의 희생 위에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몸보다 세상에는 더 중요한 일이 많다. 지금의 두통보다도 지금의 지침 보다도 지금의 피로보다도 더 크고 중요한 것들이. 그렇게 조금씩 자신을 소홀히 하며 천대받던 몸은 하나씩 무너져내려 간다. 그리고 그 끝에 남는 것은 서러움뿐이다.


<끝>


* 사진: 결국 낫지 않는 다리로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병원에 와 있다. 병원에서 일을 하고 가끔은 뛰고 엄마 옆에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시간이 귀하다.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도 해가 진다. 높은 병원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노을이 졌다. 수많은 아픈 이들의 서러움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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