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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Oct 30. 2022

Please, be kind

This is how I fight

나는 요새 사랑을 많이 생각한다. 다정함과 친절함을 생각하고, 관용과 수용, 연민, 자비, 소속감을 생각한다. 모두 다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너무 뻔하다. 온갖 드라마와 노래에서 사랑은 언제나 아무렇게나 정의되고 난무한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란 어떤 상태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따듯하고, 부드러우며, 편안하고, 안전감을 주며,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있는 그대로 수용해 준다. 바꾸려고 하지도 않고 부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랑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그냥 별생각 없이 받았던 심리상담 때문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느 날 아침에 몸은 그토록 검진을 하는데 마음도 검진이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한번 인생의 중간 점검처럼 상담을 받아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나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사회적 페르소나가 잘 정립된 사람입니다. 적당히 합리적이고, 적당히 추진력이 있으며,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 세우기도 잘하고, 직장상사가 일을 준다면 해낼 수 있다, 저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페르소나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고, 이젠 당신의 성격이 되었다고 할 만큼 두텁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실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어요. 남들에게 더 할 수 있다 말할 때 당신은 이미 120%의 에너지를 쓰고 있어요. 하지만 타인은 모르죠. 아직 더 할 수 있겠다 여겨서 더 일을 주면 당신은 200%를 쓰고, 남들이 보기에 괜찮아 보였는데 속은 이미 만신창이입니다. 이런 페르소나를 가진 사람을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는 좋은 사람인가요?”


“당신의 인생에서 몇 가지 일들은 누가 생각해도 힘들었겠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특히 그런 일을 말할 때 당신은 그냥 별일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든 것이 별일 아닌 듯이. 하지만 당신 안에 다 쌓여 있습니다. 눌러두기만 하면 언젠가는 터져 나올 거예요.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이제부터 바꾸던지,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의사로서 결정을 내려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상담을 막상 마쳤을 때에도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멍했고, 그랬구나 하고 머리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울음이 터지지 않았다면 이 일은 아마 인생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내가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는 나를 미워했던 것 같다. 실패를 할 경우는 더 그랬다. 왜 못했는지 자책했고 말하지 못한 일은 그거 하나 말하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무엇인가를 해내면 칭찬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만족하면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었나 보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듣기가 싫어서 잠을 줄여가며 일하는 적도 많았다.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동시에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길 바랬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쌓여 감정적인 날은 자책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참을걸. 말하지 말걸. 속으로 앓았다. 그렇게 눌러 온 것들을 결국 견뎌내는 건 내 몸과 마음이었다. 어느 날 이렇게 사는 게 괴롭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니 더 스스로를 책망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날 떠올린 내가 살아온 방식은 내가 조용히 스스로를 때리고 꼬집으며 일으켜 세워 걷게 하고 뛰게 한 것 같았다. 덕분에 성실했던 것 같다. 채찍질은 성실함을 가져왔고 한눈 판 적 없이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 사랑은 없었다. 나는 나를 존중했던가? 나는 나를 충분히 아껴주고 있는 그대로로 봐주고 있는가?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스스로를 사랑해 준다는 것은 그저 우쭈쭈 하며 달래주는 것일까. 힘든 것들, 불편한 것들은 모두 하지 않도록 하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일까?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를 향해 드리운 채찍을 거둬들이는 것. 그때부터 무리하면서까지 무엇인가를 이루도록 밀어붙이는 것을 그만뒀다. 그러고 나니 지친 내가 보였다. 내 몸도 지쳐 있었고 마음도 지쳐있었다. 쉼 없이 달려오느라 만신창이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이 요가였고 요가를 하면서 왜 이 동작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지 자책을 그만뒀고, 더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도 그만뒀다. 동작을 이어가다가 더 이상 무릎이 펴지지  않는다면 그 선에서 그저 머물렀고 알아차리기만 했다. 동작이 익숙해지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이루겠다는 마음도 잠시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잠도 일찍 자고 충분히 잤다. 그전에는 12시 전에 잠드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묘한 죄책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피곤하면 8시에도 잤고 9시에도 잠이 들었다. 한동안은 그간 쌓인 피로 때문인지 취침시간을 9시 반으로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을 할 때는 어떤 일을 제안받으면 너무 많은 긴장과 고통을 동반하면 그럴 능력이 안된다고 솔직히 말하고 거절했다. 원어민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던 영어도 그만뒀다. 무엇이든 마음에 행복이 없다면 선택하지 않았다.


이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수용해주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해주고 이해해주고 있었다. 사랑은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없다. 무엇이 되었든 나에 대해 No를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그대로를 이해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친절함은 의외의 결과를 가지고 왔다.


나는 이 경험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밌다고 생각한다. 왜 삶은 점점 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택하는데 이런 변화를 주는 것일까? 정말 오묘하다.


나는 먼저 무리하게 웃고, 무리하게 떠는 것을 그만뒀다. 친절한 직업인으로서의 가면을 벗어버렸다. 만들어진 친절한 말투와 표정을 버려버렸다. 프로로 가장한 얼굴도 벗어버렸다. 대신 편안한 상태로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으려고 노력했다. 부족하면 부족함을 알아주고 솔직하게 사과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지난 삶이 실패였다면 내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대신 성실한 노력에 대해서 스스로 기쁘게 생각했다. 누군가 칭찬을 하면 감사하게 여기고 그것이 기분이 좋으면 솔직하게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전에는 두려워서 쓰고 있던 가면이 없어지자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자 그전에 비해 에너지를 덜 쓰며 살았다. 그런데 일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한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책임졌다. 점점 일은 안정적이 되어갔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내 일상의 조건들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도 보였다. 내가 많은 것들을 참아주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타인도 나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참아주고 살고 있었다. 그것은 또 그대로 표현했다. 팀장님께도 고맙다는 이야기를 했고, 동료, 후배에게도 고맙다고 표현했다. 마음에 점점 여유가 생기자 사람들과 더 가까워졌다. 살면서 사회생활로 친구를 이토록 많이 만든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친해진 적이 있었던가. 삶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벗어던지자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달라진 것 하나도 없는 일상과 일이 재미있었고 어느 날은 즐겁기까지 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스스로에게 베푼 친절은 사랑에 대한 많은 이해를 가져왔다. 나는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고 있었던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의 이해가 쌓이자 다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고 설레고 잠 못 이루고 때로는 서로 얽매는 것, 아니면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듯 희생하는 것 그것이 다였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친절이 아니면 무엇일까. 스스로 변할 수 있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는 일임을 이해해주고, 기다려주고, 부족하고 불완전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이해한다.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너는 지금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도 회피하지 않으며 마주하고 진솔한 대화를 한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 아니고서 설명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단연코 누군가에게 이 사랑을 베푼 적이 없다. 이제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 차례라는 것 또한 마음 깊이 음미한다. 나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다정함을 연습하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요가와 명상을 하는 의도다.


마음 챙김에는 친절이 필요하다. 진실과 마주하기 위한 힘이다. 진실은 때로는 아프다. 내가 내 생각보다 더 찌질한 사람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어리석고, 집착하며, 우울하고, 화도 잘 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모든 합리화를 걷어낸 자리에 들어선 진실은 때로는 두렵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나쁜 사람일까 봐 두렵다. 그때 친절이 길을 알려준다. 그 마음이 내 안에서 일어나도 괜찮다. 따뜻한 알아차림은 그대로를 본다. 그대로를 수용한다. 찌질함도 수용하고, 거칠고 나쁜 마음도 수용한다. 수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옳고, 맞기에 그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 스스로 불완전 한 사람이라는 것, 때로는 날씨처럼 이런 마음도, 저런 마음도 왔다가 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알아주는 것이다. 마음의 날씨가 변한 것일 뿐임을 알아주면 마음은 내가 아니고 잠시 왔다가는 손님임을 이해한다. 그런 손님이 자신인 줄 알고 그토록 미워하고 채찍질하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했던 건가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받아들여 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건 내가 느끼는 사랑이다. 소속감은 사랑과 비슷한 감정의 종류로 분류한다고 심리학자의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이제는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소속감을 느낀다는 것은 내 존재가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다. 어떤 사람, 조직, 문화에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이다. 그래서 자리를 허용한다는 것은 사랑이다. 자신이 감정에도 마음에도, 타인에게도 자리를 허용해 주길. 그 허용이 절대 두려운 결말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신뢰한다.



사랑은 소속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연구를 하며 찾아낸 또 다른 놀라운 점은 몇몇 개념이 짝을 이룬다는 것이다. 인터뷰에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소속감에 관해서도 이야기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사랑과 소속감의 개념을 분리할 수 없다. 기쁨과 감사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둘에 대해서는 7장에서 설명하겠다. 하나를 말할 때 다른 하나를 절대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나 경험이 밀접하게 얽혀 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서로 짝지어진 것이다. 사랑과 소속감이 바로 그렇다. 사랑은 소속감에 속해 있다.

  셋째, 사랑과 소속감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수천 개의 사연을 수집하고 나서 나는 이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생물학적, 인지적, 육체적, 영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속하기를 원한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타고난 대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무너진다. 주저앉고  멍해지고 괴로워진다. 남을 아프게 만든다. 그리고 병든다. 병들고 괴롭고 멍해지는 데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사랑과 소속감의 부재는 늘 고통으로 이어진다.

  10년에 걸친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음의 개념과 정의를 도출해내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함께 살펴보자.

  | 사랑 | 자신의 가장 취약한 모습과 강한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고 알릴 때 그리고 믿음, 존중, 다정함, 애정을 통해 생겨나는 영적 유대감을 소중히 지킬 때 우리는 사랑을 키울 수 있다.

  사랑은 주거나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키우고 보살피는 것이다. 이미 자기 안에 사랑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자라날 수 있는 유대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수치심, 비난, 무시, 배신, 애정을 베풀지 않는 태도는 사랑을 뿌리부터 갉아먹는다. 이런 방해 요소를 인식하고, 치유하고, 줄여야 사랑이 살아남을 수 있다.

| 소속감 | 자신보다 큰 무언가의 한 부분이 되고 싶다는 인간의 선천적 욕구다. 이 욕구는 너무도 근원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남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면서까지 이 욕구를 충족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진짜 소속감이 아닌 빈껍데기일 뿐이며, 심지어 소속감을 얻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참된 소속감은 불완전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때에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소속감의 크기는 자신을 얼마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 (중략)

“여기에 날 끼워주기만 한다면 네가 요구하는 그 어떤 모습으로든 그 어떤 사람으로든 변할 수 있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런 말을 한다. 불량한 패거리부터 남의 험담까지, 거기에 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 소속감을 느낄 수 없다. 소속감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얻을 수 있다. - <나는 불완전한 나를 사랑한다, 브레네 브라운 저> 중에서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의 대사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넘어가 주세요.

[웨이먼드 대사 중]

- You think because I’m kind that it means I’m naive, and maybe I am. It’s strategic and necessary. This is how I fight.
-  The only thing I do know is that we have to be kind.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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