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동산 거지의 항변

정신 승리의 날입니다.

by 콩작가

서울에도 경기도에도 지방에도, 이 한국에서는 집이 없다! 집이 없는 사람이 느끼는 묘한 상실감에 대해 써볼까 싶다.


내 나이 마흔쯤 되어가니 집이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꽤 있다. 집에서 물려받은 사람들도 있고, 신혼 때 빚으로 집을 샀다가 부동산 가격의 등락 시기를 잘 타서 계속적으로 자산을 불린 사람도 있다. 여전히 빚을 갚으며 집을 소유한 사람도 있다.


회사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 중에는 부동산 자산가가 꽤나 되는 것 같다. 물론 카더라 통신으로 들었다. 어디 어디네 부장은, 어디 어디네 차장은 뭘 해서 얼마를 벌었다더라. 이런 이야기들은 5분만 사람들 모이는 데 있어도 듣게 된다.


오늘은 그래서 왜! 도대체! 집이 없다는 것은 뭔가 모를 이상한 감정을 주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사실 쓰면서 생각 중이다.)


실제로 내가 집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전셋집이지만 어엿한 나만의 공간이 있고 나는 그 공간에서 충분한 안정과 휴식을 취한다. 심지어 이 동네는 살아도 살아도 정이 든다. 그럼에도 누군가 몇 십억 하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던지, 아파트로 얼마를 사서 얼마를 벌어 더 좋은 동네로 간다더라 하는 소식을 들으면 내심 기분이 묘한 것이다. 나만 없다. 집이..!


질투인지 패배감인지, 상실감인지, 피로감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무엇이 되었든 씁쓸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스스로의 감정을 성찰한 것이기에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다.


첫 번째, 나는 범주에 들지 못했다는 생각. 번듯한 집 한 채 있는 것은 부의 상징이든, 성실함의 상징이든 상징하는 바가 있다. 이 사회에 번듯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의미를 준다. 대기업과 아파트. 어떤가? 이 사회의 중산층 상징의 양대 산맥 아니겠나. 하지만 중소기업에 전셋집은 아직 어떤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대기표 같은 상징이다. 나는 이 무리 안에 들지 못했다. 나는 사회가 정한 모범 답안에 비켜 나가 있다.


두 번째, 넌 그럼 그동안 뭐 했니?라는 질책. 물론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첫 번째 이유 때문에 어느덧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뭐 했지? 이 나이 먹도록.. “ 이런 마음이 들면 씁쓸함은 더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억울한 것이다. 나도 나름 잘해왔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며 그간 했던 고생들과 성실함의 반증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젠 또 서럽다. 고생 고생했는데 결국 이 모양이구나.. 하고 자신의 자리를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솔직히 피곤하다. 숱한 그지 같은 경쟁을 뚫고 40년을 살아왔는데 아직도 나는 줄 서기와 사회의 어떤 보이지 않는 규정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10대 때는 딱 두 부류만 있었다. 수능 성공자와 수능 실패자. 아등바등 그 피 끓는 청춘의 여린 가슴을 부여잡고(?) 공부를 해서 얻는 건 패배자 아니면 승리자다.


수능 전에는 성적으로 줄을 세우더니, 수능 후에는 학교 이름으로 줄을 세운다. 그리고 20 중반이 되면 번듯한 직장이 문제다. 이제는 회사의 이름으로 줄을 세운다. 공기업과 대기업. 무엇이든 이름 있는 곳을 가야 한다. 그렇게 20대와 30대를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기 위해 자기 계발서와 영어를 껴안고 살아가고 나면 이젠 집이다. 집은 더 줄 세우기가 좋다. 지역, 평수, 브랜드, 학군까지 줄 세울 요소도 다양하다.


부모님 말씀이 맞았다. 평범하게 살기란 이렇게나 어렵다. 이 사회에서 번듯하고 평범한 중산층이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살다 보면 내재화되는 것은 무엇일까.


며칠 전에 김누리 중앙대 교수의 인터뷰를 읽었다.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 교수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샌델은 능력 주의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 트럼프 현상‘을 만든 근본적인 배경이 능력주의 경쟁 교육에 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경쟁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 소수의 오만방자한 엘리트와 절대다수의 굴욕감을 내면화하고 있는 대중들로 사회가 완전히 갈라져 있다는 것.


이에 김누리 교수는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부와 권력이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재능이 있어서, 좋은 대학을 나와서 누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머지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 게을러서, 못나서, 좋은 대학을 못 가서‘라고 내 탓을 하며 불행해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오만한 소수와 절대다수의 굴욕을 내면화하는 이 능력주의라는 것이 과연 실제 공정하게 측정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운은 개인의 능력과는 무관하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 특출 난 재능을 타고나는 것 등과 같은 불운과 행운, 사회의 구조적 역할도 쏙 빼놓는다는 것이다. 가장 슬픈 건 능력주의로 개인의 마음에 내재화되는 굴욕감으로 인해 정신적 차이까지 벌어진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부동산 거지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또한 나에게도.


집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집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소외감, 굴욕감, 패배감, 열등감이 문제다. 굴욕감과 열등감이 주는 것이 행복일리 없지 않나.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뒤늦게라도 어떤 대열에 편입하기 위해 애쓰는 것 아닐까. 나만 없을 수는 없고, 나만 제외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되돌아와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렇다면 이 치열한 싸움에 편입할 것인가? 하는 물음. 돈과 생존. 너무도 인생의 당연한 과제에 나도 몰입할 것인가 하는 물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못하겠다. 나에게 맞는 옷이 아니다.’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결과로써의 돈을 원한다. 행복과 성공, 돈은 가치관이 될 수 없다는 어떤 책의 구절이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셋은 사실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가장 나다운 일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기를 원한다. 그 과정을 충실히 이행하고, 삶을 감사히 살면 결과로써 행복이 주어질 것이다. 또한 그 결과로써 돈이 있길 바란다. 목적이 돈과 생존이라 그것을 얻기 위해 골몰하는 삶이 되길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충분히 괴로웠기 때문이다. 성공과 돈, 생존을 쫓으며 얻은 것은 번아웃뿐 남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동산을 공부하기가 싫다. 그것이 가장 나다운 일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또 해보려 해도 잘 되지도 않았다.


내 나이 마흔,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이 꼭 나에게도 좋으리란 법은 없다. 불완전하더라도 나의 삶을 살고 싶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에 우르르 몰릴 때 나도 따라가고 싶지 않다. 타고난 나의 그릇에 맞는 삶,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키고 사는 삶, 나의 경험과 재능으로 주어진 일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충분한 여유와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해내고, 그 결과는 무엇이 주어지든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높은 고층 아파트 보다도, 가치관과 나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일을 하며 충만함이 가득한 삶, 그저 소소한 일상이 살아 숨 쉬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2023년 5월, 정신승리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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