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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Oct 24. 2021

놓치지 않을 거에요.TPO에 맞는 옷차림

맨날 찍는 인생극장


우아한 문화 살롱에 어울리고 싶은 내 이야기는 왜 늘 짠 내 나는 인간극장으로 끝나고말까.

(띠리리 리 - 인간극장 타이틀 뮤직)



정발산을 가운데 두고 반을 딱 접으면 우리집과 아람누리 미술관이 만난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때 했던 데칼코마니를 연상하면 쉽다. 정발산을 중심축으로 우리 집과 아람누리 미술관은 대칭이다. 산을 가로질러 가면 가장 빨리 미술관에 닿을 수 있다. 다른 교통수단들은 모두 산을 빙 둘러 한참을 다른 곳을 헤매야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한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마스크도 가세한 여름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미술관에 가야 했다.


'미술관 도슨트 수업이니 모두들 갖춰 입고 오지 않을까. 그래,  너무 막 입고 가지는 말자.' 걸인처럼, 산에서 방금 내려온 이외수 작가의 컨셉으로 제멋의 자유를 구가하던 내게도 한줄기 사회적 동물로서의 양심은 있었다.




내게는 뾰족한 굽의 6CM 하이힐이 있다.

잘 빠진 놈이다.

몸을 편히 받쳐준다는 통굽은 안된다.

한번 찍히면 피도 눈물도 없을 뾰족구두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산 와인 허리 같은 맵시의 구두다.


© Clker-Free-Vector-Images, 출처 Pixabay


나는 산을 가로지를 것이다.

나는 TPO에 맞는 옷을 입을 것이다. 

T(Time), P(Place), O(Occasion), 시간, 장소, 상황에 걸맞게 입으려면 이 구두는 놓칠 수 없다.

양자는 모순된다.

6CM 구두를 신고 산을 넘을 수는 없다.

제아무리 높고 험준한 산이 아닌 야산이라도 그건 아니다.

불가능하다.


고민이다.


그래, 가방에 구두를 넣고 운동화를 신고 산을 넘은 후

평지에 도착하면 구두로 갈아 신는 거야.

정장 슈트에 운동화를 신는다고?

그게 어때서, 이 아침에 누가 나를 본다고

아침 운동객들은 저마다 운동에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들 한테는 무관심할 거야.


아무도 못 보게 빠른 발 놀림으로 산을 넘자. 휙휙


양손에 가방(공부 가방, 신발 가방)을 들고 산을 넘는 건 너무 힘든데


배낭을 메고 가면 갈만하지.

과연 정장 슈트에 배낭이 어울릴까.

세상 편한 내 배낭은 고릴라 홀더가 달린 브랜드라 진정 정장과는 미스매치인데,



도대체 뭐가 이리 어려운 거야.

외출 한 번하고 

문화를 좀 향유하겠다는데


뜨거운 내적 번민은 얼마 가지 않았고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당일 아침 정장 슈트를 입고 하이힐을 비닐에 담아 고릴라 배낭에 담았다. 그리고 편한 러닝화를 신고 산을 넘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오랜만에 입은 정장 바지, 여름 방학 내내 불어난 살, 등을 지지고 있는 배낭이 다 한몫을 했다.


산을 넘자 바로 미술관이 발밑에 있다. 미술관 뒤 벤치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있다 한들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배낭을 열고 힐을 꺼내 신고 운동화를 싸서 넣었다. 땀은 땀은....


하지만 괜찮다. 내겐 마스크가 있다. 

다 가려줄 것이다.

화장실로 가서 땀을 닦았다.

운동을 겸해서인지 몸이 개운했다.

교실로 들어가 한숨을 돌렸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한두 명쯤이다.

센스 있게 가져온 트레비 탄산수를 꺼냈다.

탄산수를 여는 순간, 펑하고

분수처럼 높이높이 솟아올랐다.


© jamie452, 출처 Unsplash


깨끗하게 정돈된 미술관 강의실 바닥이 철퍼덕 물바다가 됐다.

헐레벌떡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가져와 닦았다.

서너 번 왔다 갔다 닦으니 깨끗해졌다.

그런데 그 위를 걸을 때마다 신발이 들러붙었다. 쩍쩍


아놔~


누군가의 신발에 붙어 끈적거린다면

나는 화장실 물품창고로 가서 대걸레를 가져와 물을 묻혀 빡빡 닦았다.

사람들은 점점 모여든다.

식었던 땀이 다시 송글송글 솟아올랐다.

하루의 시작은 그랬다.


온 가족이 모인 저녁시간이다.

여보, 얘들아, 엄마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까.

남편: 아니, 말하지 마, 벌써 괴로워.

큰아들: 하시고 싶으면 하시는데, 편히 즐기면서 하세요.

작은 아들: 하고 싶으면 해야지. 엄마 맘대로 살아.


난 분명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는 걸까.

'오늘도 엄마가 나가서 또 무슨 사고를 쳤구나.' 

뭐 이런 스토리일 거 같다.


아니, 난 왜 늘 인간극장이냐고.

짠 내 나는 염전이냐고.


오늘 하루는 그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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