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숲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순간 길에서 벗어났다. 날은 어두워지고 주변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외롭고 무서웠지만 나는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어딘가에 도달했다. 그곳엔 또 다른 친구들이 걷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걸었다.
나는 길을 벗어난 사람이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사귀고 직장에 들어가고 연애를 하고 가정도 갖는... 그런 보통의 길에서 벗어난 채 걸어왔다. 중간중간 학교도 다니고 했지만 우울증에 지배된 삶이라 졸업증명서 같은 조각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내내 외롭고 막막하고 무서웠다. 우울증은 어떻게 하면 없어질까? 언제쯤 난 해방될 수 있을까? 우울증으로 경력 없는 30대 중반의 여자는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 있는 나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나는 도처에 나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만 남들과 다른, 비정상적인 길을 가는 것 같은데... 이 길이 맞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우리가 서로를 모를 뿐이다. 만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모월 모일 모시에 전등을 켜자!"라고 한다면 전국이 반딧불 무리처럼 반짝반짝 빛날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방구석에서 우울증을 견디며 유령처럼 사는 내가 혐오스럽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 같았는데 지금 돌아보니 대단한 거였다. 우울증이 있는데도 살아남다니...
그리고 어딘가에서 남과 다른 길에서 버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무리에서 이탈한 채, 혹은 무리 안에서 남과 다름을 감추고 자기 나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정말 아무나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대견한 사람들이다.
꼭 살아남아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다.
초등학교를 지나면서 등교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먹먹할 때가 있다. 그 중에 몇명은 벌써부터 친구 사이에서 어색함에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따돌림을 당하고 혹은 우울증도 앓고 나와 비슷한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고통들을 어딘가에서 어린 생명들이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릴 때의 자기를 닮은 아이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날 닮아서 스스로 못난 것처럼 느끼고 친구들하고 못어울리는 느낌을 받고...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아이.
한때는 중2병 소설로만 보였던 '호밀밭의 파수꾼'이 어떤 역할인건지 이제는 좀 와닿는다. 특히나 자살률 1위의 우리나라에는 아이들을 지켜줄 그런 어른들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역할이라고 하지만 별건 없다. 그냥 우리가 자기 인생에서 끝까지 살아남고, 그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풀어놓으면 된다. 호밀밭의 가장자리를 걷다 어느새 길을 벗어나버린 아이들에게 이 길로 가도 괜찮다고, 이 모든게 너의 인생이라고, 이렇게 상처받고 이런 일을 겪은 사람도 지금 살고 있다고 한점 빛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는거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삶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가정환경이나 성향, 우울증 증상, 꿈 등이 비슷한 사람은 내 이야기에 공감하겠지만, 또 다른 상처와 환경과 꿈을 가진 사람은 공감을 못할수도 있다. 그러면 그것과 비슷한 상처를 경험한 사람, 같은 꿈을 가진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그 작은 공감이 위기의 순간에 한 사람을 살릴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우울증 경험자들은 소중하다. 세상에서 오로지 자기만 잡아줄 수 있는, 길을 잃은 누군가가 있으니까.
우울증이 낫고 좋은 직업도 갖고 삶을 정상화(?) 해야만 말할 자격이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해야 하는건 우리의 고통이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하는 잘난척이 아니니까.
그냥 내가 오늘 버텼음을, 내가 오늘 살아있음을 이야기하는걸로도 충분하다. 그걸로도 누군가는 하루를 더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