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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16. 2019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

-소중한 자기 고백

  

 메이드 일의 형태적인 기본 구조는 이렇다.

 호텔의 각층마다 담당 메이드가 있는데 그 담당 메이드는 A라고 하고 그 층의 물품을 보관하는 스테이션의 키를 쥐고 그 층에 해당하는 전반적인 관리를 책임진다. 그리고 일정 기간에 한 번씩 담당하는 층이 로테이션된다.

 한 층에 A와 B가 있는데 입사 경력 순으로 오래된 사람이 A가 되고 신입일수록 B가 되어, B다 A의 헬퍼가 되는 식이다. B도 개인 객실을 할당받아 독자적으로 일을 하면서도 A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A를 돕기도 한다.   

 

 3개월 차 신입이었던 나는 매일 다른 층에 B로 일을 했다. 따라서 한 층의 관리를 담당하는 A가 일정 기간 동안 같은 층을 정비하는 것과는 달리 오늘은 어느 층에서 어떤 A와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나도 A가 될 것이고, 어느 한 층에 정착하게 되겠고, 가능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 빨리 A가 되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B생활도 나름 재미있다.

 매일 새로운 층, 새로운 객실, 새로운 스테이션, 새로운 A를 만나기 때문에 같은 직장을 가지만 매일이 새로운 경험이다. 같은 일을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기분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이 A언니들을 만나는 것이다.

 매일 아침 미팅 때 전 직원이 같은 공간에서 만나기 때문에 얼굴은 알고 지나치면서 인사는 하지만 A, B로 만나면서 호흡을 맞추고 땀 흘려 일하면서, 또 마치고 간식을 나누어 먹고 사적인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사람 냄새가 정겹다. 이곳에서는 내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한다. 언니들 말로는 이 일은 보통 40대에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60되는 언니도 있고, 대부분이 50대로 보인다. 50대의 A언니들은 대체로 말을 놓고 호칭도 진짜 친구처럼 바로 이름을 부른다.     


 몸을 사용하는 일이기도 하고, 같이 밥 먹고 샤워까지 하며 안팎으로 속을 다 보는 일이라서 그런지 내가 만난 언니들은 참으로 직설적이고 호탕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집이 폭싹 망했다든가, 미용실을 했는데 가까운 사람한테 사기를 당했다든가, 당구장을 했다가 문 닫고 여기 왔다든가, 집에서 살림 살고 애들 키우다가 처음 일을 시작했다든가 각자의 이력을 소탈하게 이야기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다양한 망한 이야기나 이혼이나 사별 같은 각자의 사연과 아픔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어 힘든 이야기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을 해도 다들 별로 심각하지 않고 금방 유쾌해졌다. 처음엔 찌질한 낙오자들처럼 보였던 그들, 실패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어벤저스 같은 언니들이 점점 더 괜찮아 보였다. 


 살아온 세월이 더 되고 일적인 선배로서 갖 입사한 후배에게 나름 도움이 되라고 인생 조언도 아낌없이 했다. 일상적인 대화들 속에서 놀랄만한 내공의 말들을 듣게 될 때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무심히 수건을 개던 어떤 A언니가 이렇게 말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살아보니 허무하다. 이 일을 하면서도 책을 보든지 뭘 배우든지 뭘 해야 된다. 아니면 청소하다가 세월 금방 간다. 나는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나, 김금화로 살고 싶다."

 이 말은 단지 메이드로 살아온 50대의 여성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어디서든 누구에게서든 한 번쯤 들어봤고 또는 스스로 해 봄직했을 말이다.

 우리라고 해보자. 우리는 왜 항상 나, OOO로 살고 싶어 하면서도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무언가로 사는 것을 힘들어하고 불만을 가질까?

 금화 언니의 갑작스러운 고백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었다.

 언니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토해내듯이 말을 하더니 이내 진지한 자신의 고백이 머쓱한 듯이,  "오늘 저녁은 뭐를 해먹나?" 중얼거리며 다시 재기 발랄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로 살고 싶다는 자기의 소리가 터져 나올 때, 그 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이기가 두렵기 때문에 서둘러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는 모른다 하더라도 무의식에서 나로 살고 싶다는 자기를 만나려면 지금까지 살아오고 쌓아온 현실의 모든 것들을 깨뜨려야 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금화 언니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는 마음속 깊은 곳에 '나, 000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행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며, 타자에 의해서든 나 자신에 의해서든 아무리 외면하고 억압한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불편함이고 거룩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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