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도 독특한 구성과 사랑스러운 캐릭터들, 철학적이고 심오한 언어들에 매료되어서 전집을 샀는데, 의식의 변화와 함께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착하고 순진해서 매사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주인공, 아기해달 보노보노와 언젠가는 있는 힘껏 낙지를 한방에 날리고 싶어 하지만 아직까지 해보진 못한 포로리를 좋아했었는데, 이번에는 단연 야옹이 형이었다.
야옹이 형은 하찮은 말 같은 건 안 한다.
야옹이 형은 별로 얘길 안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만 힐끔 풍경을 보고, 쿵쿵 걸어간다.
숲 속 동물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홀로 동굴에서 지내고 있는 야옹이 형은 고독한 존재로 항상 방관자로 있고 싶어 한다.
과거가 폭로될 것 같지만 그때마다 사라져서 비밀이 유지된다.
야옹이 형은 누군가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야옹이 형의 은밀한 즐거움은 작은 즐거움이다.
이렇게 쓸쓸한 즐거움은 자신과 남을 배반하지 않는다.
야옹이 형의 모토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해. 모두가 함께 하는 일은 모두 함께 해.'이다.
야옹이 형 : "그래, 넌 뭘 물어보려고 왔니?"
보노보노 : "재밌는 건 왜 끝나는지 알고 싶어서요."
야옹이 형 :" 재밌는 게 끝나는 이유는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반드시 끝내기 위해서란다."
보노보노 : "그럼 재밌는 것만 계속되면 좋잖아요."
야옹이 형 :"그럴까?"
야옹이 형 : "그럼 저 태양이 계속 하늘에 떠 있는 게 좋을까?"
보노보노 : "그러면 밤이 안 오겠네요."
야옹이 형 : "그렇지, 해가 져서 밤이 오고 그리고 또 해가 떠서 아침이 오듯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끝내기 위해 재밌는 일이 끝나는 거란다."
보노보노 : 잘은 모르지만 오늘도 재밌는 일이 시작된다! 분명히 그럴 거야...
룸메이드를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은 언니에게 농담처럼 내가 잘되면 한턱 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나의 멘토였던 언니는,
"메이드가 잘 돼 봤자 메이드지 뭐.. “
하면서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 언니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반듯하고 건강했고 모든 면에서 적절한 언행과 태도를 견지해서 타의 모범이 되는 모습으로 눈여겨봐지는 인물이었는데, 단 하나 안타까웠던 것은 낮은 자존감이었다.
"메이드는 아무리 자기가 잘났다 해도 결국 우린 다 똑같아. 메이드는 그림자야."
이런 식의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때 언니가 사용하는 ‘그림자’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느낌이었다.
언니는 자주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을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그렇게 보는 사회적 시선과 위치, 구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말을 하는 이 언니의 언어가 대단히 세련되고 품격이 있었으며 동료들이 그 언니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남 볼래 에뛰드 삐아쁘 노래를 듣고, 법정 스님의 책을 읽는 등 본능적인 존재 욕구가 언뜻언뜻 보였다. 검은 곰의 털 사이로 황금빛이 살짝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의 반듯한 몸가짐이나 바람처럼 가볍게, 빛처럼 빠른 속도로, 어떠한 상황이든 일을 해내는 모습이라든가, 일처리가 늦고 미숙한 후배가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 방 하나를 번개처럼 후딱 처리하고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언니가 얼마나 프로페셔널하고 멋져 보이는지 스스로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메이드는 메이드일 뿐이고, 그림자일 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멋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멋짐을 잘 모르는 이 멋진 언니가 아침에 락커에서 삶은 달걀 3개를 주었다. 달걀은 메이드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간식거리 중 하나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을 하면서 배가 쉽게 고파지는데 고단백의 완전식품인 달걀은 허기를 속이는데 아주 유용하다. 한때 달걀 다이어트를 한다고 질리도록 삶은 달걀을 먹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제 내 삶을 책임지기 위한 일터에서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동료에게 받은 달걀 세 개가 애틋하다.
하루 종일 달걀 하나 까먹을 틈 없이 바빴다가 퇴근 후 바닷가에 앉았는데 아침에 받은 달걀이 생각났다. 급히 까먹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데미안이 생각났고, 이미 조금 깐 달걀 하나와 나머지 두 개는 막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연출을 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지난 4년은 오랫동안 내 안에 큰 질문으로 있었던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첫 구절을 이해하느라 분투했던 시간이었고, 이 고통스러운 과정이 끝나면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면서 모든 것들을 통합하게 될 줄 알았다. 도깨비방망이처럼.
얻는 것도 많았고 잃은 것도 있었고, 아름다웠지만 아팠고, 불협화음이 있음으로써 조화로운 화음이 더욱 빛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여정도 데미안에서의 메시지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고자 하는 여정은 끝이 없으며, 오직 길 자체만이 의미로 드러난다는 걸 깨닫고 있다.
달걀 퍼포먼스를 마친 후 혹시 모래가 묻지 않았는지 잘 살펴보고는 껍질을 까서 맛있게 먹었다. 나도 남모르게 배고파하는 후배에게 몰래 달걀을 전해주는 속 깊은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야옹이형 이야기로 시작해서 멘토 언니 이야기를 한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는데, 의도는 멋진 그림자로 느껴지는 멘토 언니에게서 동굴에 사는 야옹이형의 포스가 느껴져서였고, 나도 멘토 언니처럼, 야옹이형처럼 멋진 그림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