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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16. 2019

파인애플. 무화과. 석류

 

 아침에 조금 일찍 출근을 해서 커피를 마시면서 동영상 법문을 듣고 있다. 이 시간은 퇴근 후에 바닷가에 앉아서 바다와 하늘을 보는 것 다음으로 하루 중에 좋아하는 시간이다.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관심을 갖다 보니 그 길이 불교와 통해있어서 부처님 법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인 줄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눈에 어떤 필터가 끼워져 있어서 왜곡되고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인 줄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그 필터를 의식하라는 말이다. 


 요즘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신념의 주체'이다. 그 신념이 병리적 자아의 집착으로 인한 번뇌인지, 진정한 존재적 힘인지 분별하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파도처럼, 구름처럼...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지에 대한 알아차림을 하다 보면 그야말로 마음이란 게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생멸이 있을 뿐인 허상이라는 생각으로 웃게 된다.

 

행복해질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을 수 있게 된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된 그날부터. 이기주의를 곡괭이로 내어 찍고 나자 곧 내 심장에서 기쁨이 어찌나 넘치도록 뿜어 나오는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의 물을 마시게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모범을 보이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나의 행복을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중에서


 ‘집에 가서 고객에게 받은 파인애플이나 먹어야지.’

 오토바이 통에 들어있는 파인애플, 무화과, 석류를 생각해 내고는 갑자기 힘이 솟아서 그 힘으로 집에 왔다.

 사실 이 과일들은 내 짝 영희가 고객에게 받은 것이다. 고객이 과일 바구니를 선물 받은 모양이고 가져가기가 뭣해서 담당 메이드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영희는 집이 주택이라 '음식물 쓰레기 = 돈'이라는 생각 때문에 파인애플을 집에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결국 나한테 준 것이다. 나한테 주고도 심지어 파인애플의 초록색 꼭지 부분이 부피가 너무 크니 여기서 잘라서 회사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져가라는 세심한 배려까지 해주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보다 단순하다. 맛있는 파인애플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우선이지 사후 쓰레기 처리까지 생각이 미치치 않는 것이다. 쓰레기 부피가 크더라도 싱그러운 초록의 꼭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도마 위에 파인애플을 올리고 커다란 식칼로 파인애플을 재단해서는 먹을 수 없는 부분과 먹을 수 있는 부분으로 분리했다. 각각 쓰레기통과 지퍼 백에 담겼다. 이후로 한 이틀간, 이 시간이면 나의 작은 침대에 온몸의 중력을 내려놓고 반쯤 드러누워 파인애플을 먹었다.

 '노랗고 새콤달콤 시원한 파인애플이 행복이구나!'

 평소에 자주 먹을 수 없는 과일 3종을 먹으면서 절로 시가 지어졌다.

 시를 지어놓고 영희에게 보여주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나만 알고 있었는데, 지상 최초로 공개한다.    


파인애플

누군가는 과일의 왕이 사과라고 하고

구군가는 포도라고 하고

누군가는 무화과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과일의 왕은 파인애플이다

가장 화려한 왕관을 쓰고 있으니까    


무화과

무화과는 희망이다

모든 열매는

꽃이 피고 질 때

열매 맺지만

무화과는 홀로

꽃 없이도 꿋꿋하게

열매 맺는다

"괜찮아, 나를 봐."

바알간 속을 내보이며

달달하게 웃는다    


석류

매끄럽고 붉은 실크 망토 속에

투명하게 빛나는 빨간 루비로 가득 채운

과일 중에 가장 부자, 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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