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자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은 여자예요. 이탈리아 남자들은 대부분 돈을 버는 이유도, 좋은 물건을 사는 이유도, 운동을 하는 이유도 모두 여자를 사귀기 위해서라는 목표가 분명해요.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문학공부를 할 때 필수적으로 다루는 단테, 페트라르카, 레오파르트와 같은 시인, 작가들이 모두 여자가 있었어요.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페트라르카에게는 라우라가, 레오파르티에게는 실비아가 있었고, 모두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문학의 소재로 해서 평생 그 한 사람에 대해서만 썼어요. 그래서 이탈리아 남자들은 여자를 보면 '저 여자 너무 아름답다', '실크 같은 피부', '바다 같은 눈동자'와 같은 멘트가 저절로 나오는 것 같아요."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인 알베르토 씨가 한 유튜브 채널에서 한 말이다. 우스개 이야기 같지만 생각해 볼수록 철학적이고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문화적인 토양이나 교육의 효과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아가서는 한 민족의 성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여성을 사랑하는 문학가 조상들 덕분에 이탈리아 남자들의 삶의 목표가 확실해졌다는 이야기다.
아비투스(HABITUS)는 프랑스 철학자,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으로 아우라처럼 인간을 감싸고 있는 일종의 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식습관을 비롯한 생활 방식, 질서가 생산, 지각, 경험되는 제2의 본성이라고 한다. 아비투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짧게는 20-30년, 길게는 수세대간에 걸쳐서 형성돼도 내려온 경험과 문화가 축적된 것으로 쉽게 바꾸거나 극복하기 어렵다고 한다.
아비투스 개념을 접하면서 유행처럼 사용하고 있는 흙수저, 금수저, 육각형 인간과 같은 단어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제2의 본성, 아비투스를 말하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도 쉽게 작심삼일에 이르게 되고, 끊임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아비투스의 끈질긴 성질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비투스와 같은 어려운 개념을 왜 굳이 알아야 하나? 우리를 둘러싼 이런 보이지 않는 습성의 막의 끈질긴 성질을 의식하는 것으로 반복의 무력함을 극복하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수년 전에 브런치 메인에 실린 글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자신은 작가 소개란에 수상 경력한 줄 적는 것도 괜히 민망해서 적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많이도, 잘도 어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을 당시에는 내 인생에 글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서 길고 긴 프로필을 써놓은 상태였기에 그 글을 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내 프로필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프로필 소개란을 비워뒀는데, 필요에 따라 다시 편집해서 재표출할 생각이다.
세계에서 보이는 텍스트나 이미지, 인상들은 내 안의 상태나 감정에 따라서 같은 것이라도 다르게 느껴진다. 당시에 내가 읽었던 그 글을 쓴 분도 그때의 자신의 마음 상태가 반영되어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프로필이 과도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소개란을 비워둔 현재의 나 같은 사람도, 한 줄만 써놓은 사람도, 온갖 사소한 경력을 죄다 적어놓은 당시의 나 같은 사람도 모두 그러한 표출 이면의 자기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별생각 없이 썼든 절박한 마음으로 썼든.
누군가에게 쓸데없이 보일지라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명분을 찾아내서 삶을 이어간다. 그러기에 누군가 내가 이해 못 할 절박함으로 과도한 표출을 하는 것에 대해, 또는 침묵으로 수동적인 공격을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할 수는 있지만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보아주었으면 한다. 그런 '봐내는 능력'이 있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능성을 시도해 볼 용기를 낼 수 있고 자신의 과도함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동시에 기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바칠 쓸데없는 명분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조차 없다면 왜 굳이 숨을 쉬는가?
돌아보면, 일단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의 색깔을 알아보고 공기를 맛보고 흙의 냄새를 맡고 가장 청정한 지하수와 가장 더러운 우물물을 마셔본 다음에, 우리가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세한 카루나틸라카(Shehan Karunatilaka), <말리의 일곱 개의 달> 5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