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였을 때, 길을 가다가 계획에 없던 길로 들어서기를 곧잘 했고, 그것은 하나의 여행이고, 모험이고, 탐험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연필, 공책, 책받침만 팔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에 대한 작은 책이나 바르면 손톱이 상하는 알 수 없는 성분의 매니큐어와 조악하게 반짝이는 플라스틱 액세서리들과 오색찬란하며 심하게 단 사탕들로 어린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그런 물건들에 마음을 뺏기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부 다 갖고 싶은 마음에 눈동자도 심하게 반짝였다. 한 개만 살 수밖에 없지만 다음에는 '저걸 꼭 사고 말겠다'는 희망에 찬 계획도 생기게 되는 마술가게였다.
보통은 문방구를 나와서 길을 나설 때 목표했던 곳을 생각해 내서 길을 갔지만, 때때로 어디에 갈 참이었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했고, 기억이 났어도 철회하고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 나의 정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무시하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보다 일어난 일에 정신을 빼앗기는 식으로 분열되었고, 그런 분열적 자아는 학습으로도, 인생을 사는 전반으로도 확대되어 그럴듯한 하나의 세계관으로 응집시키지 못하여 뭔가를 이루거나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하는, 모종의 열패감을 주는 성향으로 느끼고 있는 터였다. 그런 와중에도 또 다른 내적 자아는 알고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은밀한 즐거움과 자유의 상태를, 한 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앞만 보고 전진한 사람이 보지 못한 옆과 위, 사선 방향의 독특한 풍경의 아름다움을.
프루스트의 미로에서 발견한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하지만 모종의 죄의식이 묻은 즐거움과 자유는 힘이 약했다. 이것저것 인연이 닿는 대로 살아온 하이브리드적 삶의 궤적은 한 길을 꾸준히 가서 전문가로서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 비해 가볍고 책임감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자타의 지적을 감내해야 했다.
프루스트는 듣던바 대로 미로다. 방대하고 섬세한 미로 속에서 금방 길을 잃고 말았다.
콩브레 마을의 모퉁이를 돌아 접어든 곳은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다. 그런 길이 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가던 길을 가야 할 것 같았지만 약간의 갈등 끝에 벤야민이 만들어 놓은 길로 들어섰고, 다시 돌아서 나가기에 한참이 걸릴 것 같다는 예감을 하고 있다. 계획이 틀어지고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를 무수히 뻗어있는 교차로, 재미있는 것들로 반짝이는 길 위에서 한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다음번엔 저걸 꼭 읽고 말겠다'는 야심에 찬 포부가 일어나는, 어린 날의 문방구 같은 거인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발터 벤야민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가 만난 벤야민은 길을 잃고 헤매는 성향 즉, 타고난 결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쓸모없는 것을 유용한 것으로 바꾸는 기술에 대해 말했고, 이 위대한 선포는 나의 분열적 자아에게 놀라운 면죄부로 작용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클리나멘, 충돌, 빗겨 남, 어긋남, 실수, 사고, 실패. 잘못된 것들이 만들어내는 생성
위의 글은 올해 3월 23일 자 브런치, <길을 잃고 헤매는 기술>에서 가져왔다. 최근에 알게 된 '클리나멘'에 대한 글을 쓰다가 생각난 글감이 어릴 적 문방구와 푸르스트였고, 이 소재로 글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니 역시나 8개월 전에 써두었다. 그 글을 쓸 때의 나는 '클리나멘'이라는 개념과 그 개념을 만든 기원전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를 몰랐지만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개념은 이미 느낌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개념을 알게 되고 이름 붙이기를 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명료한 사유가 이루어지며, 보다 명료한 사유는 힘이 되고 길이 된다. 철학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루크레티우스는 어느 날 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행으로 일정하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평행을 깨뜨리고 사선 모양으로 비껴가는 빗줄기의 모양을 관찰한다. 직선을 가로지르는 사선의 빗줄기는 곧 다른 빗줄기와 합쳐져서 또 다른 형태를 만들어냈다. 자연을 응시하던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의 발생을 설명하는 근본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일 때, 만약 전혀 다른 방향과 예측 불가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우발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 충돌로 인해 전에 없던 무언가를 생성하게 된다.
루크레티우스는 사선, 가로지르기, 어긋남, 벗어남, 비껴감에 의한 충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생성의 에너지라고 보고 클리나멘(Clinamen)이라는 새로운 철학 개념을 창안한다. 우발적인 사고를 생성의 사건으로 전환한 것이다.
관찰, 사고를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생성의 힘
지금의 지구가 존재하게 된 것도 사고에 의한 것이라는 스토리는 과학적이든 신화적이든 흥미롭다. 빅뱅이라는 애초의 탄생부터가 우발적이다. 어디선가 날아든 행성의 충돌로 23.5도가 기울어진 결과 자전의 운동이 생겼고, 그로 인해 물이 있는 행성, 생명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지구도 금성과 같은 불바다로 타올라 물도, 생명도, 인간도 살 수 없는 행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사고의 존재다. 사고를 사건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생성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
기원전의 신비로운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나무아래 바위에 앉아서 세상을 응시하고, 깨닫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한 봄(visio)은 천사로부터 비롯된 능력이다.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외경심으로부터 발현되는 천사적 능력, 봄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는 하루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