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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an 30. 2024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에 대하여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이 글은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양생과 구도, 그리고 밥벌이로서의 글쓰기 (북드라망. 2019)' 중,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에 대하여' (69쪽-103쪽)의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나에게 고미숙 선생님은?


 나에게 고미숙 선생님은 작가라는 호칭보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개인적인 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뵙고 강의를 들은 적도 없다. 내가 책을 별로 읽지 않을 때부터, 고미숙 선생님이 청년 백수로 지식인 공동체를 꾸리고 세상에 알리는 과정을 유튜브 영상으로 꾸준히 지켜봐 왔던 것이 선생님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철학

 스피노자와 들뢰즈, 니체를 읽게 된 것, 철학이 삶에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고미숙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전에도 두꺼운 <서양철학사> 책을 사두고 '읽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갖고 있었지만, 철학자들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그토록 '즐겁다!'라고 외치는 고미숙 선생님의 간증 덕분이었다.


낭송

  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낭송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고미숙 선생님의 강조! 덕분이었다. 낭송을 하다가 다시 습관적으로 음소거 상태로 돌아갔을 때, 어느 날 다시금 낭송의 중요성을 설파하시는 글이나 영상을 보고는 다시 소리 내어 읽기를 이어가곤 했다. 소리 내어 읽기는 확실히 '읽는 신체'를 만드는 힘을 북돋워 준다.


공부모임

 작은 규모지만, 또 지속가능에 실패했지만(일시적이라고 믿고 싶다), 박사 학위나 독서지도사나 어떤 자격도 없이 선생님이 하시는 공부 모임 같은 것을 흉내 내어 시도하는 용기를 냈던 것도, 고미숙 선생님의 강의가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청년 백수들의 유일한 자립의 길로 늘 강조하시는 공부와 밥과 우정이 곧 삶이 되는 공동체를 표방한 것이다.


읽고 쓰기

 출간을 서두르고 마케팅을 전혀 하지 않아서 그저 책을 써보고, 그 글을 모아서 출간을 해 본 경험으로만 남았지만, 첫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고미숙 선생님의 "읽어라! 써라!"는 외침이 한 몫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영상으로 뵈었지만, 그 열정적인 외침에 전도되어 읽기 시작했고, "읽었으니 써라!"는 외침에 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읽고 쓰긴 했지만, 그 동력이 약해질 때마다 선생님의 영상 강의나 책을 보면 죽비를 얻어맞은 듯이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특유의 흔들림 없이 확신에 찬 어조로 단호하고 명료한 읽고 쓰기의 철학을 설파하시는 모습은 언제든지 기운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보시지는 않겠지만 이 페이지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책이 곧 별이다


 핵심은 아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왜 길이 막혔는지를 아는 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길이 열린다. 어느 방향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책이 바로 지도다. 별이다.


 "책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늘의 경이와 땅의 후덕함, 삶의 비전에 관한 모든 것이, 인류가 그 지도를 찾기 위해 해온 분투와 모험이, 지나온 길과 지나가야 할 길이, 공자의 고매한 음성과 붓다의 사자후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과 디오게네스의 파격이, 조르바의 춤과 허클베리 핀의 뗏목이, 이것이 바로 별의 떨림이고, 대지의 울림이다. 이 울림과 떨림 속에 인간의 살림이 있다."



신의 선물

-읽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모든 경전은 인류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기록한 것이다.

 '코란'은 '읽는다'는 뜻이다. 

 인도의 고대 경전 '베다'는 '알다'라는 의미다. 

 붓다의 깨달음은 '와서 보라!'로 압축된다. 

 '읽다. 알다. 보다'의 거룩한 변주!

 최후의 심판, 천국의 지복, 신의 선물이 오직 책이라니!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이들에게 신이 줄 수 있는 보답 같은 건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지복을 누리고 있으므로. 

 그러니 읽어라! 읽는 자에게는 천국이 함께 할지니!



혁명은 책의 해방이다

-모든 이에게 책을 허하라!


 모든 혁명의 성과에는 '책의 해방'이 있다. 

 앎의 해방이 혁명의 궁극적 비전이다.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권리를 허하라! 

 모든 존재에게 책을 허하라!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은 책을 읽는데서 시작한다. 

 누구나! 무엇이든! 다 읽을 수 있는 세상! 

 그리하여 모두가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

 


책이 곧 '나'다!

-자의식에서 자존감으로


 배움이 노동이 아니라 활동이 된다.

 노동의 결과는 스트레스지만 활동은 신체적 활기를 수반한다.

 뭐든 읽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세미나를 통해 <에티카>(스피노자)를 통독한 회원이 말했다.

 "내 독서 이력은 <에티카>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

 <천 개의 고원>에 흠뻑 빠진 한 청년은 말했다.

 "이젠 철학을 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삶의 행로를 바꾼 한 중년은 

 "이제 니체를 읽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고 했다.


 책이 주는 기쁨이란 이런 것이다. 

 그 기쁨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실로 거룩한 체험이다. 

 나 또한 기꺼이 간증을 해본다면, 나에게 일어난 변화란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많이 보면 지식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그 모든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아파야 산다> 같은 생물학 책을 읽으면 나의 생물학적 연대기가 그 안에 펼쳐지고,

 <동의보감> 같은 의학 고전을 읽으면 나의 병력과 체질을 알 수 있고,

 <사피엔스>, <축의 시대>를 읽으면 내 안에 있는 야성 혹은 영성이 꿈틀거린다.

 스티븐 호킹의 책들은 나란 존재가 우주 전체와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 주고,

 <주역>을 읽으면 천지인의 삼중주를 음미할 수 있고,

 불경을 읽으면 마음과 우주의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다.

 당연히 그 주인공은 나다. 

 모든 책이 나에 관한 길이고 지도다.

 실로 거룩하지 않은가?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계속 연결, 확충해 가면 된다.

 성공과 경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심층적 차원에서 '초연결'을 시도하는 것이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 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 

 그 자체가 이미 힐링이다.

 세상을 경쟁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광대무변한 토대이자 배경으로 여기게 된다.

 그 유동성 속에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그것을 누리고 싶다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는' 신체가 되는 것, 

 모든 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다이어트에도 영성이 필요하다?!


 책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귀중히 여긴다네. 

 몸과 마음의 기가 자연히 합쳐져 팽창하고 발산해서 저절로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지. 가령 숙독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해도, 역시 소리 내어 읽는 것만 못하지. 소리 내어 읽어 나가다 보면 얼마 안 가서 깨닫지 못했던 것도 자연히 깨닫게 되고, 이미 깨달은 것은 더욱 깊은 맛이 난다네. 

 대체로 책을 읽을 때는, 우선 소리 내어 읽으려고 해야지 생각만 계속해서는 안 된다네. 입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의리가 저절로 나오지. (주희, <낭송 주자어류>, 93-95쪽)


 "음식을 먹을 때 주의하여 스스로 식사량을 헤아릴 줄 알아야 건강하고 편안하게 오래 살고 늙음과 질병이 늦게 온다네."

 식사량을 조절하지 못하는 파세나디 왕에게 부처님이 읊으신 계송, 이 계송을 듣고 파세나디 왕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음식을 줄일 수 있었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에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예배를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현세의 참다운 이익과 미래의 참다운 이익, 이 두 가지의 이익으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음식의 양을 조절하여 살이 빠지고 건강을 되찾게 하였으니 현세의 이익을 주신 것이요, 또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마음을 챙겨 중도의 법을 알게 하셨으니 현세와 후세의 이익도 함께 주셨습니다."

(조민기, <불교신문> 3213호. 2016년 6월 27일 자)



에로스는 로고스를 열망한다


 깨달음이란 진리를 "혈육에 융화시키는 행위"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춤추고 발이 춤추게"(<낭송 주자어류>, 65쪽) 된다.

 만약 이 문장이 좀 낯설고 뜨악하다면 당신은 에로스와 로고스, 감성과 지성을 날카롭게 이원화하는 20세 기적 인식에 사로잡힌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지루하고 노쇠한 사유의 그물망에, 거기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앎의 본능을 폭발시켜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이 생성시킨 그 무수한 질문들, 거기에 응답하면 된다. 그게 뭐냐고? 읽는 것이다. 타자에 대하여, 나에 대하여, 또 사랑의 본질과 윤리에 대하여. 읽고 또 읽어라! (......) 책이 아니고는 타자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책이 아니고는 자신을 온통 뒤흔들어 대는 욕망의 배치와 유래를 가늠할 도리가 없다. 책이 아니고는 타자의 심연에 가닿을 방법이 없다.



공자와 붓다의 지복을 누리고 싶다면?

읽어라!


학이시습(學而時習)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 장 <학이편>의 첫 구절이다. 

<논어>를 대표하는 문장이자 공자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직립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

 어쩌면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열망이 직립을 가능케 했을지도 못 든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사람답게 사는 게 뭐지?

 공자의 답은 간단하다. 

 배우고 익혀라!

 뭘? 뭐든! 시시하다고? 그런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본성이 아닌 지엽말단에 빠진 것이다.

 무엇이 지엽이고 말단인가? 

 부귀, 성, 쾌락, 취미, 권력, 명예 등이다.

 인간을 번뇌에 빠뜨리는 것이.

 화폐와 에로스! 그것이 주는 신체적 보상은 쾌락-섹스. 이 항목들과 학이시습의 차이는?

 전자는 증식이고 후자는 공감이다. 증식되는 것들에는 즐거움은 없다. 쾌락과 자극이 있을 뿐! 

 그래서 학이시습의 즐거움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가장 읽차적이면서 근간이 되는 것은 읽기다.

 읽는 행위가 없는 학습은 없다. 책이 없는 배움은 없다.

 묵독이든 낭독이든 낭송이든 일단은 읽어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사람을 읽고 계절을 읽고 사물을 읽는다.

 오직 '읽기'에서만이 가능하다.

 희로애락에 끄달리지 않고 소유와 쾌락에 치달리지 않는, 

 공자와 주역, 붓다가 도달한 그 거룩한 '기쁨'에 동참하는 길이.

 그러니 그 지복을 누리고 싶다면?

 부디 읽어라!




길 위의 인문학|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Om-tCeHpN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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