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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an 23. 2024

당신의 아름다운 정원은 어디입니까?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52세에 생애 처음으로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물론 이전에도 회사에서 하는 독서모임이나 내가 직접 글쓰기 모임을 꾸린 적도 있었지만, 구립도서관에서 하는 명실공히 내 의지로 선택한 온전한 독서모임은 인생에서 처음인 셈이다. 난독증을 알고 난 후 도서관을 오가며 게시판에서 종종 독서모임에 눈독을 들였지만 그때마다 정원이 초과해서 못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가, 이번에 이미 시작한 독서모임인데 회원이 그만두면서 생긴 빈자리가 생겨서 추가 모집을 한다는 안내문이 붙었고, 용기를 내서 문의했고, 곧바로 독서 모임에서 다룰 1년 치의 책 목록과 발제문 예시자료와 단톡방이 날아들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목차를 펼치고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1979년 난독의 시대' 바로 내 이야기인 것 같았다. 살면서 읽어온 많지 않은 책 중에 '이것은 바로 내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책은 틀림없이 향후의 내 인생을 바꾸었고, 이 책을 완독하고 첫 독서 모임을 다녀오면 내 인생의 독서의 길이 한층 더 넓고 매끄럽게 펼쳐질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난독증을 앓는 주인공 동구에게 읽기의 천사가 나타난다. 3학년 담임 선생님 박영은 선생님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무척 어렵습니다만, 동구한테는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점이 있어요."

 "동구를 야단치실 필요는 없고요, 제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동구가 좀 특별한 경우인 것 같아요."

 "동구를 보면, 암산은 아주 능하거든요.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아마 성적이 나쁜 이유는 읽고 쓰는 것을 잘 못해서 그럴 거예요. 계산을 하는 것이나 참신한 생각을 하는 것은 잘하는데 시험 문제를 읽고 이해하고 답을 쓰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책에서 본 듯한데 동구 같은 경우는 일종의 병......이랄까......, 나쁜 의미는 아니고요, 동구의 뇌 구조 자체가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느끼도록 되어 있어서, 글씨를 쓸 때 아야어여 구분을 잘 못하고 그럴 수 있답니다. 그런 증세를 난독증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아이들은 지능은 정상인데 읽고 쓰는 기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니까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거죠."

 박영은 선생님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동구를 잘 관찰하시고 동구 어머니를 불러 말씀하신다.


 "선생님은, 동구처럼 착한 아이는 처음 보았어."

 "선생님은 우리 반 친구들 중에 동구가 제일 좋아. 아니, 우리 학교에서 제일 좋아."

 "선생님이 동구한테 뭐 하나 부탁하고 싶은데 들어줄래?"

 "학교 끝나고, 선생님이랑 둘이서 한 시간씩만 더 공부하자."

  이후에 박영선 선생님은 동구를 특별히 아끼고 개인지도를 해주신다. 동구는 박영은 선생님의 은총을 입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사가 잘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나의 어린 시절에 박영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운 마음과 함께 왜 소설을 읽는지 잘 알 것 같았다. 소설 속 박영은 선생님을 통해 나의 결핍이 위로받고 치유받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동구에게 박영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내밀한 소망을 품게 했다.




 첫번째 독서모임에 다녀왔다. 회원들이 낸 의견을 취합해서 사서 선생님이 정리한 독서 목록에 따라 한 달에 한 권 정해진 책을 읽고, 모임 전날까지 각자 발제문을 준비해서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올해의 첫 책은 심윤경 작가의 대표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매우 유명한 책이라 읽지 않았어도 자주 마주치던 책이었다.


 책 표지를 넘기고 목차를 보는 순간,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1979년 난독의 시대', 문구를 보자마자 호기심이 발동했고, 초등학교 3학년인데도 글을 깨치지 못한 주인공 동구의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이건 내 이야기다!' 싶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내 경우는 동구와는 좀 다른 난독증이긴 해서 동구처럼 드러나게 글을 못 읽지는 않았지만, 난독증 어린이가 느끼는 비애가 너무 잘 묘사되어 있었고, 어린 시절의 곤혹스러웠던 감정이 휘저어져서 읽기 힘들 정도였다. 


 회원님 중 한 분은 동구 할머니의 거친 입담과 욕지거리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읽기가 힘들었다고 하셨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와닿는 감정은 자기 안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고 흔들기 때문일 것인데, 이 책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누구 하나 눈길이 가지 않는 인물이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아프고 슬픈 인생을 살아간다. 

 '각자 유독 더 마음이 쓰이는 인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경우는 당연히 동구였는데, 동구를 말하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사는 야무진 동구 엄마나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것처럼 생각하고 며느리와 동구를 미워하는 할머니, 동구에게 글을 가르쳐주신 박영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또 다른 발제문은 이 소설이 출간되고 약 10년 뒤, 작가는 한 독자에게 "그래서 동구는 행복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동구의 어른스럽고 착한 마음에 독자들은 감동받았지만 정작 동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는 생각해보지 못한 데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들은 묵묵히 자기 인생조차 내걸어야 한다'라고 은연중에 강조한 게 아닌가 싶어 동구와 같이 착한 아이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졌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동구 그리고 이후 어른이 된 동구는 과연 행복해졌을까?' 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아버지와 엄마는 돈을 많이 벌고 나를 잘 키우자는 희망이 있다. 나는 나중에 박 선생님을 꼭 다시 만나자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몫으로 남은 희망은 무엇일까?'(336쪽)

 라는 문장으로 '삶을 지탱시키는 희망에 대해, 그리고 동구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어떤 삶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 나누어 보자고 했다. 

 이 발제문을 내신 분은 '지금도 딱히 뚜렷한 목표나 희망이 없는데, 동구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무슨 희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 문장이 와닿았다고 하시면서, 다른 분들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이에 어떤 분은 '뭐 하나라도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꾸준히해서 건강한 신체를 갖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기도 했고, '살면서 많은 일을 하게 되지만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을 일과 경력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말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말을 아꼈다. 반백의 나이에 아직도 꿈과 희망이 크고 많아서 독서모임에 온 첫날부터 그걸 다 발설해 버리면 이상한 사람 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고, 이 독서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차분하고 욕심이 없는 느낌이라, 정리되지 않은 내 발언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물어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다들 착하고 똑똑한 영주, 미련 맞고 덜렁대는 동구라고만 생각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처음으로,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는 순간이었다.'(112쪽)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던 장점과 가능성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을 변화시킬만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동구에게 박영선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인생에 큰 영향과 변화를 준 사람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정원은 동구의 '성장'과 '내딛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점만을 조심스럽게 모아둔 것 같은 공간'(17쪽)으로 보았다가 '흔한 것이건 귀한 것이건 이곳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다 같이 한몫을 하고 있다.'(346쪽)고 알게 될 만큼 동구는 성장하며 이해하기 시작했다. 동구에게 정원은 동경이자 사랑이고 연민이며 그리움일 것이다.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정원이 있다면 어디일까?'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과 공간을 놓고 깊이 사유하고, 질문하고, 전체를 아울러 토론하는 사람들은 여유없이 늘 치열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좀 낯선 무릉도원의 선녀들 같아 보이기도 했다. 또는 소설책 권을 읽고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시선으로 읽은 등장인물과 공간, 감정, 행간을 모으고 나누는 일은 각자 자기 솜씨대로 만든 음식 가지를 가져와서 나눠먹는 포트럭 파티를 연상시켰다. 내가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은 음식, 재료, 손맛으로 눈과 입이 즐거운 식사를 하는 즐거움처럼,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문장으로 묘사된 인물을 읽으면서도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이 투영된 각자 다른 감상과 이야기들을 듣는 것은 정말로 풍성한 이야기 뷔페 같았다. 


 재미있었던 점은 나보다 연배가 아래거나 위인 중. 장년 여성이 중심인 모임에서 고부갈등의 소재가 나왔을 때 이곳이 독서회가 아니었다면, 본인의 이야기며 친척이나 이웃의 이야기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었을 텐데, 풋풋한 90년대생 사서 선생님이 진행을 잘해 주셔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시작되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수년간 재택근무를 하면서 회의도 화상으로 해서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에서 말하는 모임을 앞두고 긴장이 되었는데, 이런저런 점을 감안해서 모든 것에 적절하게 대해 주시는 회원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편안한 분위기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태도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별히 내가 모임에 나오면서 스스로 부여한 과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쓰기를 위한 읽기, 말하기를 위한 읽기, 듣기를 위한 읽기를 통해 보다 넓어지고, 깊어지고, 연결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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