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첫번째 독서모임에 다녀왔다. 회원들이 낸 의견을 취합해서 사서 선생님이 정리한 독서 목록에 따라 한 달에 한 권 정해진 책을 읽고, 모임 전날까지 각자 발제문을 준비해서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올해의 첫 책은 심윤경 작가의 대표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매우 유명한 책이라 읽지 않았어도 자주 마주치던 책이었다.
책 표지를 넘기고 목차를 보는 순간,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1979년 난독의 시대', 문구를 보자마자 호기심이 발동했고, 초등학교 3학년인데도 글을 깨치지 못한 주인공 동구의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이건 내 이야기다!' 싶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내 경우는 동구와는 좀 다른 난독증이긴 해서 동구처럼 드러나게 글을 못 읽지는 않았지만, 난독증 어린이가 느끼는 비애가 너무 잘 묘사되어 있었고, 어린 시절의 곤혹스러웠던 감정이 휘저어져서 읽기 힘들 정도였다.
회원님 중 한 분은 동구 할머니의 거친 입담과 욕지거리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읽기가 힘들었다고 하셨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와닿는 감정은 자기 안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고 흔들기 때문일 것인데, 이 책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누구 하나 눈길이 가지 않는 인물이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아프고 슬픈 인생을 살아간다.
'각자 유독 더 마음이 쓰이는 인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경우는 당연히 동구였는데, 동구를 말하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사는 야무진 동구 엄마나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것처럼 생각하고 며느리와 동구를 미워하는 할머니, 동구에게 글을 가르쳐주신 박영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또 다른 발제문은 이 소설이 출간되고 약 10년 뒤, 작가는 한 독자에게 "그래서 동구는 행복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동구의 어른스럽고 착한 마음에 독자들은 감동받았지만 정작 동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는 생각해보지 못한 데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들은 묵묵히 자기 인생조차 내걸어야 한다'라고 은연중에 강조한 게 아닌가 싶어 동구와 같이 착한 아이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졌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동구 그리고 이후 어른이 된 동구는 과연 행복해졌을까?' 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아버지와 엄마는 돈을 많이 벌고 나를 잘 키우자는 희망이 있다. 나는 나중에 박 선생님을 꼭 다시 만나자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몫으로 남은 희망은 무엇일까?'(336쪽)
라는 문장으로 '삶을 지탱시키는 희망에 대해, 그리고 동구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어떤 삶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 나누어 보자고 했다.
이 발제문을 내신 분은 '지금도 딱히 뚜렷한 목표나 희망이 없는데, 동구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무슨 희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 문장이 와닿았다고 하시면서, 다른 분들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이에 어떤 분은 '뭐 하나라도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꾸준히해서 건강한 신체를 갖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기도 했고, '살면서 많은 일을 하게 되지만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을 일과 경력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말을 아꼈다. 반백의 나이에 아직도 꿈과 희망이 크고 많아서 독서모임에 온 첫날부터 그걸 다 발설해 버리면 이상한 사람 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고, 이 독서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차분하고 욕심이 없는 느낌이라, 정리되지 않은 내 발언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물어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다들 착하고 똑똑한 영주, 미련 맞고 덜렁대는 동구라고만 생각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처음으로,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는 순간이었다.'(112쪽)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던 장점과 가능성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을 변화시킬만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동구에게 박영선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인생에 큰 영향과 변화를 준 사람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정원은 동구의 '성장'과 '내딛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점만을 조심스럽게 모아둔 것 같은 공간'(17쪽)으로 보았다가 '흔한 것이건 귀한 것이건 이곳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다 같이 한몫을 하고 있다.'(346쪽)고 알게 될 만큼 동구는 성장하며 이해하기 시작했다. 동구에게 정원은 동경이자 사랑이고 연민이며 그리움일 것이다.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정원이 있다면 어디일까?'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과 공간을 놓고 깊이 사유하고, 질문하고, 전체를 아울러 토론하는 사람들은 여유없이 늘 치열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좀 낯선 무릉도원의 선녀들 같아 보이기도 했다. 또는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시선으로 읽은 등장인물과 공간, 감정, 행간을 모으고 나누는 일은 각자 자기 솜씨대로 만든 음식 한 가지를 가져와서 나눠먹는 포트럭 파티를 연상시켰다. 내가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은 음식, 재료, 손맛으로 눈과 입이 즐거운 식사를 하는 즐거움처럼,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문장으로 묘사된 인물을 읽으면서도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이 투영된 각자 다른 감상과 이야기들을 듣는 것은 정말로 풍성한 이야기 뷔페 같았다.
재미있었던 점은 나보다 연배가 아래거나 위인 중. 장년 여성이 중심인 모임에서 고부갈등의 소재가 나왔을 때 이곳이 독서회가 아니었다면, 본인의 이야기며 친척이나 이웃의 이야기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었을 텐데, 풋풋한 90년대생 사서 선생님이 진행을 잘해 주셔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시작되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수년간 재택근무를 하면서 회의도 화상으로 해서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에서 말하는 모임을 앞두고 긴장이 되었는데, 이런저런 점을 감안해서 모든 것에 적절하게 대해 주시는 회원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편안한 분위기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태도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별히 내가 이 모임에 나오면서 스스로 부여한 과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쓰기를 위한 읽기, 말하기를 위한 읽기, 듣기를 위한 읽기를 통해 보다 넓어지고, 깊어지고, 연결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