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이며,
다른 모든 것을 추구하는 이유는 '선'이고,
그 안에서 신의 본질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반 일리치 Ivan Illich의 얇지만 만만치 않은 책 <텍스트의 포도밭-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은 머나먼 12세기의 수도자 성 빅토르 후고(Hugues de Saint-Victor)가 쓴 <디다스칼리곤 Didascalicon>(가르침, 교육, 지식 입문)을 해설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이반 일리치는 195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1956년 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의 부총장이 되었으나 1966년 멕시코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 CIDOC>를 설립해 주류적 흐름에 반하는 대항 연구와 지식 운동을 전개하여,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스스로 사제직을 버렸다. 이후 '병원이 병을 만든다', '학교가 교육을 망친다', '전문가가 무능력자를 만든다'라고 현대적인 것의 반현대성을 폭로해 왔다.
이반 일리치는 책의 탄생과 함께 읽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던 12세기로 사상적 여정을 떠나 현대의 우리가 배우고 책을 읽는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객관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현대의 읽기에서 경험할 수 없는 지혜로운 책 읽기로 우리를 안내한다.
후고의 글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푹 젖어 있다. 그는 스승의 텍스트들을 읽고, 또 읽고, 필사했다. 읽기와 쓰기는 그에게 똑같은 스투디움 stdium(공부, 연구)의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양면이었다.
후고가 구하는 지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배우기, 구체적으로 읽기는 둘 다 '치유'인 그리스도, 타락한 인류가 잃어버렸으나 다시 찾기를 바라는 '본'이자 '형상'인 그리스도를 탐색하는 형식일 뿐이다. 후고의 사상에서는 타락한 인류가 지혜와 재결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중심을 이룬다. 이것이 후고를 이해하는 데 핵심인 레메디움 remedium, 즉 치유나 약 개념이다. 궁극적 치료법은 지혜의 신이다. 예술과 과학은 같은 목적을 위한 치료법이라는 공통된 사실 때문에 존엄하다. 후고는 읽기를 존재론적인 치료 테크닉으로 인식하고 해석했다. (25쪽)
중세적 사물의 세계에는 빛이 내재해 있으며, 사물들은 그들 자신의 발광 원천인 보는 사람의 눈에 이른다. 중세 세밀화의 빛은 신의 영혼을 향해 '손을 뻗듯이' 눈을 '찾는다'. 후고가 읽는 사람을 밝히는 빛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분명히 이 빛을 말하는 것이다. 후고가 볼 때 페이지는 빛을 발하지만, 빛나는 것은 페이지만이 아니다. 눈도 반짝인다.
오늘날의 일상 언어에서도 눈은 '빛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비유적인 말임을 안다. 그러나 후고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의 지각에서 유추하여 정신 작용을 생각했다. 초기 스콜라 철학자들의 루멘 오쿨로룸 lumen oculorum, 즉 영적 광학에 따르면 눈에서 나오는 빛은 세상의 빛나는 물체들을 보는 사람의 지각 기관 안으로 가져오는 데 필요했다. 빛나는 눈은 보기 위한 조건이었다.
후고의 인시피트는 읽기가, 타락한 인류의 눈에서 그림자와 어둠을 제거한다고 암시한다. 후고에게 읽기는 죄가 빛을 막아버린 세계에 다시 빛을 가져오기 때문에 치료다. 후고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창조될 때 눈에서 빛이 났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힘겹게 찾아야 하는 것을 항상 관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광채의 세계에서 안개의 세계로 쫓겨났으며, 그러면서 창조될 때 갖고 있던, 그리고 여전히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어울리는 투명성과 빛을 발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후고는 책이 눈의 약이라고 말한다. 책의 페이지가 최고의 치료라고 암시한다. 읽는 사람은 스투디움을 통해, 본성이 요구하지만 지금은 죄로 인한 내적인 어둠 때문에 막혀 있는 것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 (36-37쪽)
많은 사람들이 형편없는 능력을 타고나는 바람에 쉬운 것도 이해를 못 하지만, 이들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우둔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여 애써 지식을 좇고, 쉬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간다. 이들은 노력의 결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의지력의 결과로 얻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결코 최고의 것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장 작은 것도 태만히 하고, 말하자면 경솔하게도 자신의 게으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데, 그들은 그들의 능력 안에 있는 가장 작은 것도 배우려 하지 않으며, 그럴수록 가장 큰 것에서도 진리의 빛을 잃게 된다. (117-118쪽)
후고에 따르면 스투디움 레젠디는 모두에게 제시된 소명이며, 이것은 곧 배울 의무가 된다. 둔하건 총명하건, 능력이 많건 적건, 의지가 강하건 약하건 '모두'가 배움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후고 이전의 그 누구도 학습의 보편적 의무라는 신조를 이런 표현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뒷받침할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한 노력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더 영광스럽듯이, 확실히, 타고난 능력이 있고 재산이 많음에도 게을러서 둔해지는 것(torpere otio)은 더 혐오스럽다.
교회의 교의에 '모든 사람'이 어떤 특정한 것을 배우라는 부르심을 받는다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21-122쪽)
후고는 독자에게 페이지에서 발산하는 빛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그리하여 자신을 인식하라고,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라고 권한다. 페이지를 밝히는 지혜의 빛을 받을 때 읽는 사람의 자아에 불이 붙을 것이며, 그 빛 속에서 읽는 사람은 자신을 인식할 것이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문헌'을 깊이 읽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자아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전통적 아욱토리타스와 심리를 해석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는 읽는 사람이 페이지를 마주 보고, 지혜의 빛에 의해 그 양피지라는 거울에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이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칭호나 별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페이지에서 눈으로 보아 자신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39쪽)
후고의 묵상은 집중적인 읽기 활동이지, 수동적이고 정적주의적인 태도로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 이 활동은 신체 운동에 대한 유추로 묘사된다. 행에서 행으로 활보하거나, 날개를 퍼덕이며 이미 잘 알고 있는 페이지를 살피는 것이다. 후고는 읽기를 신체적 운동에 기초한 활동으로 경험한다.
1,500년의 전통에서 소리 나는 페이지는 움직이는 입과 혀의 울림으로 메아리친다. 읽는 사람의 귀는 주의를 기울이며 입이 내는 소리를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연속되는 문자들은 바로 신체 운동으로 번역되어 신경 충동의 패턴을 만든다. 행은 읽는 사람의 입이 포착하고 자신의 귀를 위해 소리를 내는 사운드 트랙이다. 페이지는 읽기에 의해 말 그대로 체현되고, 육화 된다.
루고는 수도원에서 읽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읽기는 주마등 같은 면은 훨씬 강한 활동이다. 읽는 사람은 자신의 박동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행들을 이해하고, 박자를 다시 포착하여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생각할 때는 입안에 넣어 씹는 것과 관련짓는다. 여러 자료에서 대학 이전의 수도원이 중얼거리고 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묘사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83-84쪽)
라틴어를 사용하는 후고에게 눈으로 읽는 행동은 땔감을 모으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동을 암시한다. 눈은 알파벳 문자를 따서 음절로 꾸려야 한다. 눈은 허파, 목, 혀, 입술을 돕고, 입술은 보통 단일한 문자가 아니라 단어를 소리 낸다. (88쪽)
후고는 아주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이 학생들에게 내적인 보물 상자를 구축해서 기억 기술을 확장하고 다듬는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아이야, 지혜는 보물이며 네 마음은 보물을 담아두는 곳이다. 지혜를 배우면 귀중한 보물을 모으는 것이다. 이것은 희미해지지도 않고 광택을 잃지도 않는 불멸의 보물이다. 지혜의 보물은 여럿이며, 네 마음에도 감출 곳이 여럿 있다. 여기에는 금, 저기에는 은, 또 다른 곳에는 귀중한 돌...... 너는 이 자리들을 구분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것 저런 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할 수가 있다....... 시장의 환전상을 잘 관찰하여 그가 하는 대로 해라. 그의 손이 적당한 주머니로 쏜살같이 들어가...... 곧바로 정확하게 동전을 꺼내는 것을 보아라. (56쪽)
후고의 상징, 유추, 은유로서의 책은 무엇보다도 읽기의 상징이며, 이것은 감수분열적 현실 판독으로 개념화되고 경험된다. 읽는 사람은 이런 판독에 의해 산파처럼 만물이 잉태하고 있는 의미, 즉 '하느님의 말씀'이-하느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 속에서-태어나게 한다.
세 권의 책이 있다. 첫째는 인간이 뭔가로 만드는 책이고, 둘째는 하느님이 무에서 창조하는 책이고, 셋째는 하느님 자신에게서 낳은 책, 하느님의 하느님이다. 첫 번째 책은 인간의 부패하는 작품이며, 두 번째는 절대 존재를 멈추지 않는 하느님의 작품이며, 여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작품이 창조주의 보이지 않는 지혜를 눈에 보이게 기록하고 있다. 세 번째 작품은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의 모든 작품을 만든 지혜다. (191-192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사들에 권한다.
그것(성경)을 읽어라. 그것이 모든 꿀보다 달콤하고,
어떤 빵보다 맛이 있으며,
또 어떤 술보다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