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력수프> Episode #11
올해 봄이었다. 1분에 수백만 원을 준다는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 의뢰를 정중히 거절하고 꼭 쓰고 싶었던 책을 쓰고 나서 북콘서트를 하려던 계획을 급선회하여 호텔로 갔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평화롭게 빵을 먹을 수 있도록 기쁜 심정으로 다른 일거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최후에 산문'에 나오는 이 위대한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 지났고, 3킬로그램이 빠졌다.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 가르쳐주는 진실 앞에서, 학력이나 경력 모든 계급장을 다 떼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만나는 동료들 속에서, 노동과 침묵과 겸손을 의식하며 팽창된 자아가 축소되고, 생활이 지극히 단순 명료해졌다.
오늘 샤워하면서 보니 팔다리에 언제 생겼는지 모를 멍자국들이 수두룩하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진 것 같고, 오른쪽 발가락 아랫부분의 피부가 코끼리 발의 가죽처럼 두껍게 변해있어서 놀랐다. 청소기를 돌릴 때 당나귀가 뒷발차기를 하듯이 기계를 오른발로 컨트롤하면서 하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부딪히는 발의 여린 살이 충격을 견디기 위해 두껍게 변형된 것이다.
우울해질 수 있는 변형이 있다면 기분 좋은 변화도 있다. 군살이 빠지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부가 좋아졌다. 땀을 많이 흘리고 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다. 일을 마치면 샤워를 하고 초저녁에 일찌감치 잠이 드는데, 근육의 피로로 인해 노곤해진 탓도 있겠지만 머리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억지로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을 통해 영혼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은 건강한 기분이다.
이 글의 제목 '생기로 가득한 몸'은 구도의 춤꾼으로 알려진 홍신자 님의 책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서 따온 문구로, 이 문장이 들어간 단락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베껴 쓰고 읽고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몸들을 읽어나가며 이제 몸과 함께 할 내 생애의 또 다른 숙제가 펼쳐짐이 느껴진다. 몸과 정말이지 즐겁게 놀면서 영혼에 이르는 길,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숙제다. 남은 숙제를 풀기에 충분한, 여전히 생기로 가득한 나의 몸이 더없이 고맙고 기특하다.
남반구 Southern Hemi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