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이 듬뿍 ‘신혼 그릇’

예쁜 그릇을 꿈꾸던 나,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

by 귀리밥

내가 이토록 그릇을 좋아하는 줄은 알지 못했다. 그릇은 그저 음식을 담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이렇게 빼앗아 이성을 뒤흔들 위력을 가진 물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릇에 빠져버렸다.


그릇을 향한 욕망은 아마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다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릇마다 개성이 매우 강했다. 다른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본 그릇처럼 고르고 균일한 세트 구성이 아닌, 제각각의 그릇들이 대부분이었다. 전국 각지에 살던 그릇들이 어느 날 “얘들아, 란이네 집에서 그릇을 구한대!”라는 소식에 일자리를 구하러 몰려든 것만 같았다.


황토로 구운 밥그릇에 꽃 그림이 있는 국그릇, 채소 그림이 있는 김치 그릇에 푸른 꽃 넝쿨이 있는 접시라든가 석박지와 같이 큰 김치를 담는 유리 대접이며 무엇 하나 짝을 이룰 수 없었다. 컵마저도 너무했다. 컵은 절대 돈 주고 사지 않는 게 우리 집 지론인 줄 알았다. 모든 컵에는 오픈 기념 등 모두 기념품임을 나타내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두 개 이상의 세트 구성은 없었다.


이따금 다른 집에 가면 하얗고 똑같은 그릇에 국도 담고 밥도 담아 주던데, 왜 우리 엄마는 각각 다른 그릇에 주실까? 음식은 참으로 맛있었지만 그릇들은 각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래서 식탁은 시끌벅적한 동네잔치 같았다.

KakaoTalk_20180807_163842654.jpg 둘째언니가 선물해준 과일접시 중 작은 것에 수박을 담아 먹었다.

엄마 말씀으로는 시집올 때 두 명이 밥을 해 먹을 정도의 간소한 살림으로 시작한 탓에 세트로 장만할 틈이 없었다고 하셨다.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핑계 같았다. 엄마는 질 좋고 예쁜 그릇이나 조리도구 세트가 선물로 들어오면 안 쓰고 다락에 고이 모셔 두셨다가 언니들이 결혼할 때 바리바리 싸서 보내셨으니 말이다. 검소함이 체질이 되신 엄마는 짝 맞고 좋은 그릇을 귀하게 여기셨다. 언젠가 친척이 사다준 예쁜 컵 세트도 한두 개씩 조심스레 꺼내 쓰셨다.


그런 환경에서는 시원하게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지만 내심 꿈을 꾼 것 같다. 예쁜 그릇에 담은 뽀얀 쌀밥, 그릇 안쪽까지 잔잔한 무늬가 새겨진 국그릇에 담긴 국, 같은 모양의 찬기에 봉긋하게 담은 나물과 밑반찬, 내 등짝처럼 넓은 접시에 푸짐하게 담은 과일, 핫 초코가 잘 어울리는 두툼한 머그컵, 살랑살랑 저어가며 마시는 커피는 가족 수에 맞게 세트로 말이다. 그야말로 ‘로망’이었다.


서른이 넘어 마침내 나만의 그릇을 준비할 기회가 생겼다. 첫 기회는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할 때였다.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차에 회사 근처에 원룸을 얻었다. 이때가 그릇을 취향대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때의 나는 너무 바빴다.


정말 야근을 밥 먹듯 하는 통에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 시작한 자취이다 보니 필요한 물건은 원룸 앞에 있는 생활용품점에서 대충 사들였다. 컵은 회사에서 참여한 박람회의 기념품이었다. 원룸에 들어간 뒤 서너 달 후에야 처음으로 밥을 해 먹었으니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갈 만한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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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활을 일 년쯤 한 뒤에 결혼을 했다. 비로소 제대로 내 취향의 그릇을 살 기회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때는 ‘신혼 그릇’이라는 이유로 자유롭지 못했다. 엄마와 언니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무조건 흰 그릇 10인조로 사!”

취향이나 브랜드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주 고전적인 신혼 그릇 브랜드에서 아무 무늬도 없는 10인조로 사라는 의견이었다.


“괜히 그림 있는 그릇 사면 금방 질려서 못 쓴다.”

“언니가 써봐서 아는데, 무조건 흰 그릇 사야 해.”

“신혼 그릇이 소꿉놀이인 줄 아니?”

“무조건 10인조 사야 해. 그거보다 적게 사면 집들이 어떻게 하려고?”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하마터면 흰 그릇 10인조를 살 뻔했다. 당시에는 굉장한 압박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언니들이 그릇 잔소리를 할 때마다 앞에서는 끄덕끄덕하고, 밤에 틈틈이 인터넷으로 마음에 드는 그릇을 골랐다.


일단 골랐는데, 그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남편이었다. 나와 남편은 각자 모은 돈을 합쳐 신혼살림을 장만하고 집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 것을 따로 분담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릇을 사는 것도 함께 보러 가거나 주문해야 할 터였다.


문제는 내가 고른 그릇 6인조 세트가 96만 원이었다는 점이다. 비싸다면 비싸고, 신혼 그릇 치고는 싸다고 볼 수도 있는 가격인데, 남편은 처음으로 내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자기,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런데 이게 말이야. 프랑스에서 직접 핸드메이드로 만든 건데…….”

“자기, 그릇은 쓰다 보면 깨질 수 있고, 마음 편히 음식을 담아 먹어야 하잖아. 그런데 비싼 것을 사면 자꾸 그릇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아. 물론 다른 집은 더 비싼 것을 살지도 몰라. 그렇지만 신혼 그릇이니 비싸도 된다는 생각보다 우리가 편하게 쓸 그릇이면 난 더 좋겠어. 그리고 살면서 마음에 드는 그릇은 또 사도 되잖아. 그래도 정 자기가 사고 싶다면 이것으로 사자.”

KakaoTalk_20180830_151046534.jpg 최종선택한 알록달록 신혼그릇

남편이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니 고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알아본 뒤에 처음 고른 그릇과 스타일은 비슷하되 가격이 괜찮은 국산 그릇으로 장만했다. 물론 흰 그릇을 강조하던 친정 식구들은 내가 조용히 구입한 알록달록한 그릇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결혼 이후에도 그릇을 향한 마음은 좀체 식지가 않았다. 지금은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릇을 조금씩 사지만 세트는 사지 않는다. 한두 개씩 사 모으는 그릇은 나를 몹시 기쁘게 한다.


결혼 이후 구입한 폴란드풍 파스타볼은 점심식사에 자주 사용하는 그릇이다. 시이모님들께서 선물해 주신 꽃그림 티세트와 과일접시는 아주 아끼는 그릇이고, 영화 <미녀와 야수> 개봉 기념 티팟 세트는 보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두툼한 유리 머그는 여름철 남편의 에이드를 만들어 주는 데 제격이고, 큼직한 면기는 면 요리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단골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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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도 기념이 될 만한 그릇을 산다. 특히 일본의 도자문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일본 여행을 가면 컵이나 접시를 조금씩 사서 모은다. 최근 다녀온 여행에서도 컵과 접시, 도자기 티스푼 등을 두 개씩 사 왔다. 원래 갖고 있던 그릇과도 잘 어울려 식탁이 아주 화사해졌다.

작년 겨울, 유후인 여행에서 사온 그릇들

사온 그릇은 아끼지 않고 평소에 사용한다. 장식용 그릇보다는 일상용 그릇이 좋다.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은 그릇 욕심이 많다고 놀린다. 하지만 막상 여행에서 돌아와 새로운 그릇에 차나 빵을 담아내면 그 역시 흡족해한다.

“이 그릇 사길 정말 잘했다!”


그릇을 좋아하는 내 이야기를 남편이 회사 동료들에게 했더니 다들 이해를 못하더라고 했다. 그저 음식을 담는 그릇일 뿐인데 자꾸 욕심낸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이해 못 하면 좀 어때, 이런 나를 내가 이해하니 괜찮다.


얼마 전 남편과 도예 클래스를 등록해 다녀왔다. 클래스에서 각자 만들고 싶은 작품 두 가지를 미리 생각해 오라고 했다. 나는 파스타볼을 만들겠다고 했다. 남편은 눈이 동그래졌다.

“또 그릇이야?”

“응, 또 그릇이야. 나는 그릇이 정말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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