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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l 08. 2022

우천, 소염작용하는 날

역시 비는 소염작용을 하는 게 맞다.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매우 좋아한다. 에쿠니 가오리의 수필집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에 등장하는 문장인데, 이후 비가 내리면 온 세상의 염증이 사라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어디든 염증이 있게 마련이니까. 


갈등의 골이 깊은 사람들의 염증, 거리에 버려진 물건 혹은 동물의 염증, 폭력이 난무하는 학교로 발길을 향하는 아이의 염증 등등. 그 모든 염증이 비를 맞아 소염 작용하는 건 어떨까. 하얗게 표백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염증을 걷어내 간결한 마음을 얻는 것. 문장 하나를 만난 이후 내게도 비는 어떤 유의 염증을 없앤다고 느낀다.


그리고 문장을 만나기 전부터 비를 좋아하긴 했다. 흙먼지 날리는 날보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좋았고, 간소하게나마 씻어내는 과정이 좋았다. 비가 올 때 레인부츠를 신고 큰 우산을 쓰고 나간다. 요즘 나오는 3단, 4단 우산은 왠지 믿음직스럽지 못해 길쭉한 장우산을 쓴다. 

분명 어제까지도 신록이었던 나무들이 비를 맞으니 진녹색이다. 짙은 녹색이다 못해 검게 보일 만큼 농도가 진해졌다. 그 앞으로 허옇게 빗줄기가 바삐 지나간다. 급히 지나가느라 빗줄기는 대개 직선이다. 빗줄기가 얇고 바람이 일렁이면 둥글게 퍼지듯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강수량이 넉넉한 날의 비는 늘 직선이다. 바쁘게 쏘아대는 빗줄기를 보면 바삐 달려봐야 바닥에 부딪히면 빗물들은 하나로 합쳐질 텐데, 뭘 그리 서두를까 싶다.


레인부츠는 시간대에 따라 약간의 골칫덩이다. 비가 많이 올 때 집에서 레인부츠를 신고 나가면 세상 두려울 게 없다. 아주 당당하게, 구정물 위도 슥슥 지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건널목 앞에서든, 동네 산책로에서든 비 앞에서 나약한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보다 내가 훨씬 힘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건 비가 많이 올 때의 이야기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다가 이내 그치고 해가 말짱하게 뜨면 레인부츠는 이내 골칫덩이가 돼버린다. 특히 장마철엔 발이 덥다. 양말을 신고 고무로 만든 레인부츠까지 신으면 발이 뜨끈해진다. 그리고 신축성이 없으니 걸리적거리기도 한다. 


아침엔 비가 쏟아졌지만 오후나 저녁에 약속이라도 잡힌 날, 레인부츠를 신고 나가면 식당이나 카페에서 괜히 무안하기도 하다. 매쉬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이 현자로 보인다. 대개 이런 감정은 나 홀로 감내하지만, 함께 만난 일행이 가볍게 놀리기라도 하면 홀로 감내하던 무안함이 폭주한다. 

“뭐야~ 레인부츠 신었어?”

“이제 비 그쳐서 답답하겠네?”


상대들은 그저 눈앞에 보이는 신발 얘기를 했을 뿐인데 레인부츠를 당장 어디 꽁꽁 싸버리고 슬리퍼를 사서 갈아 신고 싶어 진다. 분명 아침엔 나를 위풍당당하게 했던 레인부츠지만, 비가 그치면 사정이 달라지는 거다. 이런 무안함과 갈등을 겪는 동안 레인부츠 역시 조마조마할 터다. 

‘있다가 해가 뜨면 내 주인이 나를 골칫덩이로 생각할 거 아냐? 쳇.’


마침 오늘은 비가 왔다. 간밤의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더니 아침 해가 밝았는데도 계속 내리고 있다. 여름이지만 남편에게 긴팔 쟈켓을 입혀 출근 준비를 해줬다. 그리고 나는 레인부츠를 신고 짧은 외출 준비를 했다. 신발장에서 초록색 레인부츠를 꺼내는데 흠칫하는 게 느껴진다.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비 그치기 전에 들어올 거니까 걱정 마. 오늘 너 능력 발휘하는 날이라구.”


안도하는 레인부츠를 신고 집을 나섰다. 건물 현관에서 장우산을 팡! 하고 펼쳤다. 단지를 빠져나와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공원 산책로다. 수십 년 살아 울창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후드득, 후드득 비가 떨어졌다. 바닥에는 얕게 물이 고였고 푼푼이 날리던 흙먼지는 자취를 감췄다. 

새들은 어디 있으려나 살펴보니 키가 작고 몸집이 큰 나무 아래에 오종종하니 서 있었다. 체구가 아주 작은 참새는 나무의 가지도 아닌 줄기 위에 매달려 하늘거렸다. 유유자적한 모습 같기도 하고, 이 비가 언제 그치나 심심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참새 무리들끼리 비를 피해 수다를 떠는 것도 이젠 지겨울 테지. 넷플릭스도 없는 참새니까 말이다. 


산책로를 걸으며 나무들을 훑어본다. 다들 오래간만에 내린 굵은 비에 샤워 중이다. 바작바작 말랐던 껍질들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수분을 가득 머금는다. 물론 비가 와서 그렇겠지만, 그렇다 해도 산책로가 아주아주 한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며 걷다 보니 자전거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비가 오니 자전거를 타는 게 불편할 터다. 오래간만에 자전거들 쉬는 날이다. 주인이 우산 쓰고 나가버리면 자전거들은 계획에 없던 연차를 쓰고 평일을 만끽하는 직장인 같다.


한적하게 산책로를 걸으며 솨솨솨 빗소리를 축적했다. 그저 걷기만 했는데 소염작용 다 끝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람. 비가 오든 안 오든 해결해야 하는 걱정거리들이 제 자리를 찾아 떠난 기분이 들었다. 제 자리에서 목욕재계하고 흰옷을 입은 걱정거리들이 해사하게 웃으며 양손을 펼쳐 보인다. 역시 비는 소염작용을 하는 게 맞나 보다. 


그렇게 빗속을 20분쯤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산을 접고 실내로 들어가며 내가 사랑하는 리스트에 비 오는 날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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