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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l 26. 2022

부엌에서 벌어지는 창작

글문이 막히면 부엌으로 간다

안 먹고 살아갈 순 없기에 매일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한다. 분명 살기 위해 하는 건 맞지만, 단 하나의 이유로 요리하는 건 아니다. 내가 은근히 요리를, 더 정확히는 요리하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요리라는 게 범위가 워낙 넓어 ‘요리를 좋아한다’라는 나의 사담에 파워블로거나 셰프급 요리를 떠올릴지 모르나 사실 대단한 메뉴를 만드는 건 아니다. 밥과 국에 반찬과 메인 요리를 제때 만들 시간은 잘 나지 않아 우리 집에서는 보통 한 그릇 요리나 메인 요리 하나를 만들어 먹곤 한다. 파스타 한 그릇, 비빔밥 한 그릇, 국수 한 그릇 등이 자주 등장한다. 가끔 고기찜이나 전골 요리를 풍성하게 끓여 먹거나 야채를 가득 넣은 전을 부쳐 반주를 곁들여 식사하는 날도 있다.


요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마는 최근에는 강아지의 음식도 손수 만들어준다. 육류와 채소를 손질해 건조기에 오랜 시간 말려 건조 간식을 자주 만들어주고, 강아지 요리책을 보며 간단한 국이나 파스타 등 요리를 해주기도 한다. 

최근 만들어준 댕댕이 간식. 단호박 양갱과 단호박 닭가슴살말이

사람은 맛있는 음식에 “맛있다”라는 단순한 후기를 남기는 편이지만, 강아지야말로 후기를 성실하게 표현하는 존재다. 간식 하나를 먹기 위해 강종강종 뛰며 따라다니고 냉장고 앞에서 종종걸음을 친다. 먹고 난 다음에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안겨 갖은 애교를 부린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강아지에게 요리해주는 쪽이 조금 더 보람이 있는 듯하다.


어쨌든 사람이 먹든 강아지가 먹든 내가 만드는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이 잘 우러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다. 양념 맛이 강하고 찡한 것보다 재료의 개성과 자신감이 화들짝 피어나는 맛이 좋다. 


이를테면 조개가 품은 쌉싸름한 바다의 감칠맛이라든가 돼지가 좁은 우리에서 고통받으며 산 증거로 기름이 골고루 퍼진 살과 육즙, 퉁퉁한 딸기를 입안에서 깨물 때 사르르 퍼지는 단맛이라든가, 흙투성이 냉이가 깨끗이 몸단장을 마치고도 땅 내음을 떨구지 못하는 맛이라든가. 인위적으로 맛을 입히기보다는 재료가 애초부터 갖고 있던 맛과 풍미 그대로를 간직한 요리가 좋다. 거기에 부족한 게 있다면 소금 조금 혹은 간장 조금으로 간을 맞추면 충분하다. 


그렇게 만든 요리를 그릇에 소복하니 담아내면 ‘와, 이렇게 하나를 완성했네.’하고 뿌듯함이 둠실거린다. 재료의 개성이 듬뿍 담긴 음식을 만들고 편한 마음으로 식탁 의자에 탈싹 앉을 때의 유쾌함이란. 그러니 요리라는 행위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작아지는 날일수록 부엌으로 간다. 자신이 모래알처럼 작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일 년 전쯤엔 인생에 절대 없을 것 같은 벙어리 시절이 찾아온 적 있다. ‘글태기’란 게 실제로 있었다. 젊어서부터 줄곧 쓰는 일을 해온 내게 글문이 막히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건만. 온 세상에 질병이 들이닥친 영향인지 1년 가까이 아무 글도 쓰지 못하는 나는 벙어리였다. 작가로 살아가는 내가 고작 이 모양인가 싶어 허탈했고 기가 찼다. 


쓰는 일을 사랑하는 자가 쓰지 못하면 즉시 자신이 하찮아진다. 모든 시간이 무용하게 느껴질 때 딱히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으면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때가 되면 밥을 했다. 나를 위한 요리를 해서 천천히 먹었다. 평소 하기엔 오래 걸려 꺼리던 메뉴는 공들여 만들어 퇴근 후 돌아온 남편과 먹었다. 

남편 코로나 걸려 격리생활할 때 만들어준 사식들

그마저도 공백을 메우고 싶을 땐 과일을 잔뜩 사서 과일칩을 만들거나 빵을 구웠다. 그렇게 요리라는 소박한 창작활동을 하고 나면 아직은 내가 창작과의 거리가 아주 멀어지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요리는 누굴 따라 하든 완전한 복제가 될 수 없다. 타인의 레시피를 따라 하더라도 여러 번 반복하며 손에 익고 나면 언제부턴가 나만의 창작이 된다. 


부엌에 오래 서있으면 무릎이 조금 아프고, 손질할 거리가 많은 일을 하고 나면 손목도 조금 시큰거린다. 그래도 그 소모적인 창작활동 후에는 ‘나는 오늘도 창작을 쉬지 않았구나!’라며 칭찬할 거리가 생기는 듯하다. 

카스테라를 만들어서 모카랑 간식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홀로 뿌듯함을 빚어내는 작가의 부엌에는 요리를 향한 사랑이 폭죽을 터뜨린다. 쓰고 싶은 마음이 뭉클하게 밀려올 땐 서재에서 키보드를 다각다각 누르고, 쓰고 싶은 게 없고 글문이 막히면 부엌에 들어가 조물거리고 논다. 어느 쪽이든 창작을 쉬지 않는 사람이라며 스스로 자신감의 겹을 쌓는다.


그 결과물은 가족과 함께 즐긴다. 김치볶음밥이나 겨우 만들던 신혼 때와 달리 이제는 많은 요리를 해봐서인지 어지간하면 망하지 않으니 즐기는 게 맞을 것이다. 오늘은 부엌에서 어떤 창작을 해볼까. 아, 일단 냉장고를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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