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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l 20. 2022

디즈니는 내게 희망을 알렸다

앞으로도 내 몫의 행복이 남아있을 거란 두근거림

어릴 적 일요일 아침은 두근거리면서 반반의 확률에 기대를 거는 시간이었다. 정확히는 20% 정도의 적은 확률로 얻고 싶은 게 있었다. 그건 일요일 아침 9시경 공영방송에서 나오는 디즈니 만화였다. 


디즈니의 시작은 우연히 보게 된 미키와 미니 마우스였다. 만화라서 가능한 유연한 움직임과 과장된 몸짓은 단순히 사랑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눈썹이 없는 미키는 개구쟁이의 입매를 가졌고, 어떤 표정을 지어도 선량함이 가득했다. 미니는 긴 속눈썹을 깜빡이고 치마를 펄럭이며 내가 되고 싶은 소녀의 모습을 보여줬다. 

‘만화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거구나.’ 


어깨를 움직이기만 해도 눈앞의 주인공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종종 등장하는 귀여운 도널드와 구피가 있었고, 밤비는 정말 키우고 싶었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와 같은 예쁜 여인의 캐릭터도 좋았고 늘 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피노키오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 우연히 디즈니 만화를 본 후, 매주 일요일을 기다렸다. 평소 일요일 아침 8시면 우리 가족은 아침 식사를 모두 마쳤다. 이후 아빠가 마당에서 나무를 가꾼다거나 무언가를 고치기 위해 안방을 비워야만 디즈니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집에 단 하나뿐인 텔레비전은 안방에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아빠는 식사 후 텔레비전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화를 보고 싶다고 말을 꺼내 봤지만, 핀잔과 호통만 돌아왔다. 딱 한 번 디즈니 만화를 틀어준 후 5분쯤 지나 말없이 아빠가 보고 싶은 채널로 돌린 게 호의의 전부였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이면 잠에서 깨 잠시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부리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오늘은 만화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하지만 기도가 통한 날은 별로 없었다. 이후로도 디즈니 만화를 볼 수 있는 건 아주 드물게 아빠가 텔레비전 앞자리를 비운 날 마음 졸이며 즐기는 짧은 순간이었다. 혹은 친구 집에 놀러 가 친구의 엄마가 빌려다 주는 비디오테이프에서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다양한 디즈니 작품이 영화로 등장했다. 그때 내 마음에 우뚝 자리한 작품은 <미녀와 야수>였다. 그 작품이 마음에 들어온 이유는 미녀가 착해서, 왕자와 사랑에 성공해서, 야수의 사랑에 감동해서가 아니었다. 극에 달하는 순간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 등장하는 음악 때문이었다. 


교과과정에 영어가 없던 시대였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의 노래였지만 노래가 주는 감정은 알 수 있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면 생기는 멋진 변화에 대해,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에 대해 간절하게 전하는 이야기의 노래였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벨은 사람의 외형이 아닌 야수와 손을 잡고 둘만의 무도회를 연다. 흉악한 이빨에 다칠지 모를 거대한 대형동물인 야수지만, 속마음은 따뜻하다는 믿음이 있기에 두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영어 단어 하나 모르던 나이였지만 미녀와 야수의 ost를 들으면 어린 나이에 갖는 힘듦도 언젠가는 해결될 거란 믿음이 생겼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영어를 배운 이후 사전을 찾아가며 하나하나 해석한 미녀와 야수 ost는 역시 나의 예상과 맞았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며 생기는 변화를 말했다. 누군가는 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틀릴 수도 있다. 그것은 매일 해가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진실이었다. 


그렇게 미녀와 야수를 더욱 사랑하게 됐고, 하나씩 접하는 디즈니의 모든 작품을 사랑했다. 화면 속에 모든 캐릭터는 사랑스러운 굴곡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 굴곡과 함께 들려오는 음악은 내게 희망적인 감정을 남겼다. 


현재가 어떠한 빛을 띠든, 마음에 얼마큼의 짜깁기가 있든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말이다. 행복할 가능성을 미리 포기하지 말라고 어깨를 너울너울 움직이며 노래를 했다. 그래서인지 부모의 지시와 규율 안에서 살아야 하는 미성년자 시기를 벗어나 스스로 선택하고 지불하며 살아가는 성인의 시기에 접어들고도 디즈니의 작품은 빠짐없이 사랑했다.


아마 많은 세대를 어우르며 디즈니의 작품은 사랑받을 것이다. 이제 다수가 부모가 된 내 또래의 사람들은 디즈니 작품을 보며 미처 털어버리지 않은 동심을 꼭 끌어안고 말랑한 마음가짐이 될 것이다. 그 말랑한 마음을 자녀에게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그 자녀들은 어릴 적의 나처럼 사랑스러운 동작과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고, 은연중에 희망을 느낄 것이다.


이제 나는 수없이 봐서 다 외워버린 작품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시간을 보낸다. 일요일 아침마다 기도하지 않아도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디즈니 만화를 보며 나는 부유해진 기분이 들곤 한다. 원하는 시간에 디즈니 만화를 틀어놓고 문득문득 눈에 들어오는 움직임을 눈에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부드럽게 일상을 보낸다. 여전히 희망적인 감정을 선물 받는다. 또 여전히 뭉클해진다. 보고 싶은 만화를 못 봐 절절매던 어린 시절에 비해 많이 행복해졌다고 느끼지만, 그럼에도 내게 부여된 행복이 아직 남아있을 듯한 기대도 생긴다. 


이럴 때 월트 디즈니의 역사와 주가와 OTT의 실세는 아무 관계없다. 빛이 내려오는 수면을 향해 긴 손을 뻗고 나아가는 인어공주처럼 축복받은 삶을 살고 싶도록, 디즈니의 캐릭터들은 오늘도 내 어깨를 조물조물 두드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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