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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y 04. 2022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타인을 향한 넓은 이불 같은 사랑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삶과 이야기를 만난다. 내게 주어진 생은 단 하나. 그렇기에 타인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나는 건 소풍에서 보물찾기 쪽지를 찾는 듯 즐거운 일이다. 


최근 만난 이야기는 다소 침침했다. 함께 일하는 NGO를 통해 전해 들은 그 이야기는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 AIDS 환자 집단 거주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 역사에도 특정 질환자를 작은 섬에 몰아넣고 인권을 유린한 바 있다. 캄보디아의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도 그와 다름없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시설이 없다시피 한 곳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환자와 가족들은 직접 지붕을 세우고 집을 지어 살아가기 시작했다.


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던 터라 시내에서 쓰레기를 주워 오거나 건설 일용직으로 나가 생계를 이어야 했다. 물론 그 일감마저 부족해 생계를 잇기엔 어려웠고 음식을 먹고 비바람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당연히 아이들은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미래는 신기루였다. 사진 속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안색이 좋지 않았고 입을 옷도 변변치 않은지 거의 헐벗은 상태로 황무지 같은 땅 위에 모여 앉아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캄보디아라는 먼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이유로 밥을 굶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 기초생활수급제도가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다고는 하나 그 돈으로 월세와 생활비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그 가족에게 ‘밥’이라는 건 매우 간절해진다.


명절을 앞둔 어떤 저소득층 가정에서 열 살배기 아이는 명절 음식을 먹고 싶다는 동생을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아 라면 한 봉지와 참치 통조림을 사서 참치라면을 끓여줬다. 물론 자신의 것은 없었다. 그렇게 끓인 한 그릇 라면이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최선의 명절 음식이었다는 이야기에 나는 명치 밑에서 뜨뜻한 게 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 뜨뜻함은 끝없이 발생하는 사각지대에 대한 불만과 욕지기일 수 있고, 자의와 상관없이 열악함을 버티는 대상을 향한 연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혹은 통장의 잔고를 생각해본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내가 지금 가진 것에서 얼마쯤 나눠도 되지 않을까?’


기꺼이 지갑을 열고, 통장의 숫자를 바꾼다. 직접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타인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눈다. 그런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 말한다.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색할 때는 온기라 부르기도 하고, 정성이나 나눔이라고도 한다. 

그 감정이 사랑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사랑이라 하는 게 맞는 걸까 홀로 고민에 빠진 적도 있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문은 커졌다. 사랑이란 무엇이기에 일면식 없는 아이에게 내 것을 떼주는 걸까. 각박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 살면서 왜 타인의 밥상과 어린아이의 발육을 걱정하고 폭력에서 구해내려 고심하는 걸까. 


결국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과 일이라 한다.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걱정 없고 시름없는 사람을 찾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는 일면식 없는 타인의 아픔을 덜어내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과 동기는 무슨 말로 담아낼 수 있을까. 


또 한편으로는 도움을 받는 대상이 이 감정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의 의문도 있다. 누군가는 사랑에서 우러나왔다며 내민 얼마큼의 금전적 도움이나 노동을 받는 대상이 동정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사랑을 의심하진 않을까. 혹 주는 이는 사랑이되 받는 이는 절망이면 어쩌나, 사랑이 퇴색되면 어쩌나, 하고 앞선 걱정과 조바심을 내본다.


스스로 질문하고 의심하고 다시 답하면서 나는 그래도 그 감정과 동기를 사랑이라 불러야 맞다고 느낀다. 사랑이라 명해야 그 감정을 잘 지켜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사랑을 더 적확히 표현하려면 박애(博愛)라고도 할 수 있겠다. ‘넓을 박’에 ‘사랑 애’ 자를 쓰니 넓은 사랑이다. 평등한 사랑이다. 사랑은 가까운 단어 같지만, 박애는 왠지 멀고 숭고한 존재 같았다. 하지만 글자를 하나씩 풀어보면 박애는 그저 넓디넓은 이불 같은 사랑일 뿐이다.


넓은 사랑이 유지되려면 사랑하는 자의 표현이 더욱 촘촘해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 중 <취미는 사랑>이라고 있는데 노랫말에 ‘몇 잔의 커피값을 아껴 지구 반대편에 보내는 그 맘’이 나온다. 몇 잔의 커피값과 이른바 ‘시발비용’에 거침없이 털어낼 얼마큼의 재산은 사랑하는 데 쓰면 좋겠다. 


습관처럼 주문하던 커피를 줄이면 허공을 지르던 아이의 눈빛에 희망을 심을 수도 있다. 모아둔 포인트나 얼마쯤의 돈을 사용하면 명절에 겨우 라면 한 그릇을 먹던 아이들이 내내 마음에 남을 뜨신 밥 한 그릇 먹을 수도 있다. 그러니 사랑일 수밖에. 사랑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사랑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 

넓은 이불처럼 폭닥하게 덮어주는 사랑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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